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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Woo Lee Mar 23. 2024

준비물

출판전야의 철학

출판전야를 준비하며 다양한 장소를 탐방했다. 어떤 점이 이곳을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걸까. 한 장소의 매력을 결정하는 것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었지만 핵심은 운영자로 보였다.


운영자가 어떤 철학을 갖고 장소를 가꾸고 있는지, 얼마나 애정을 쏟고 있는지 드러나는 곳이 기억에 남았다. 그런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면 운영자와 내적으로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고 정을 붙이게 된다.


블루도어북스, 책바, 경일옥 핏자리아 같은 장소가 내게는 그랬다. 장소 곳곳에 운영자의 마음이 묻어 있었다. 운영자의 주관에 따라 선별된 책, 소품, 가구, 칵테일과 피자 메뉴… 이런 것들을 경험하며 손님은 운영자와 간접적으로 소통한다.


이런 장소에는 손님이 방명록과 같은 형태로 흔적을 남기는 경우가 많았다. 장소를 매개로 운영자와 손님이 공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면 김춘수의 시 ‘꽃’의 한 구절처럼 그곳은 손님에게 특별한 곳이 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와 반대편에 있는 공간을 간 적도 있다. SNS에 공유하고 싶을 정도로 멋진 인테리어를 가진 곳이었지만 운영자의 철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있더라도 깊이가 부족해 보였다. 공간 오픈에 맞춰 급조된 사상누각 같은 느낌.


이런 경우엔 운영자와 손님 간의 공명이 일어나지 않고 장소는 특별해지기 어려워 보였다. 만약 더 화려하거나 유행에 부합하는 공간이 나타나면 잊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책방, 캔들 나이트 등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리는 상상헌의 운영자 안나와 나눈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안나는 상상헌이 물리적 공간에 묶이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이 있는 곳이 곧 상상헌이라고. 북아현동의 재개발로 상상헌이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더라도 괜찮은 이유였다.


안나의 말처럼 장소의 매력은 물리적 공간보다는 운영자에 달린 일이었다.


나는 어떤 마음을 갖고 출판전야를 운영하려는 걸까. 살펴봤을 땐 그냥 그런 곳이 있으면 참 좋겠다라는 두루뭉술한 형체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조차 제대로 형언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출판전야의 철학을 잘 조각하고 다듬을 필요가 있었고 고독을 시작점으로 삼았다. 출판전야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키워드였기 때문이다. 고독을 원해 찾아오는 곳을 운영하는 사람은 고독에 대해서만큼은 단단하고 날카로운 관점을 갖고 있어야 했다.


글은 혼자 써야 한다, 혼자 있으면 글이 잘 써진다라는 어렴풋한 생각만으론 부족하다. 고독의 뿌리까지 파고 들자. 왜 우리는 글을 쓰기 위해 고독해져야 하는가. 고독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고독과 관련된 책을 눈에 보이는 대로 사서 읽었다. 주위에선 내가 읽는 책의 표지를 보고는 혼자 있고 싶은 거냐 농담하기도 했다.


관심을 가지니 세상엔 생각보다 고독을 다룬 책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신기한 건 고독에 대해 이야기하는 신간이 꽤 있다는 거였다. 초연결 시대에 사람들이 고독의 결핍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책 하나 하나 완독할 때마다 뿌듯했다. 출판전야의 가장 중요한 준비물인 내가 쌓여가고 있다는 감각. 내게 영감을 준 책들이 꽂혀 있을 출판전야의 서가를 상상하니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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