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집중
출판전야를 시작할 때 2024년에는 오픈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때로 정한 구체적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데드라인이 필요해 정해 둔 목표였다.
3년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준비 2년 차가 되기까지는.
오프라인 공간 관련 모임에서 알게 된 친구들과 종종 만났다. 모이면 각자 준비하고 있는 공간 관련된 근황을 나눴다.
만날 때마다 업데이트가 있는 친구들과 달리 나는 그대로일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다들 멋지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극을 받았다. 나는 뭐 하고 있는 건가.
두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니었다. 책도 읽고 참고할 만한 장소도 방문하고 인스타그램에 게시글도 올렸다. 근데 그것만으로 장소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니까.
출판전야를 만들기 위해선 하드웨어적인 준비가 필요했다. 숙소가 들어설 자리를 알아보고 건물을 올릴 자금을 모으는 일. 결국엔 해야 될 일이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선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대로변이 아닌 골목 깊숙한 곳을 누볐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가격이 낮을 테니까.
골목을 걷다가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면 가격을 알아봤다. 다 쓰러져 가는 집이 5억을 가뿐히 넘겼다. 알고 보니 언젠가 재개발되길 기다리며 방치된 집이었다.
기약되지도 않은 재개발이 현재를 잠식했다. 집주인은 여기 살지 않으니 오히려 동네가 슬럼화되는 걸 바라지 않으려나. 재건축을 원하는 아파트가 부러 외벽을 새로 칠하지 않는 것처럼.
이러나저러나 서울에서 숙소를 열려면 땅을 사는 데에만 5억이 넘게 필요했다. 대출이나 임차도 고민해 봤지만 모두 부담이었다. 대출 이자나 월세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이미 자취방 월세와 관리비로 매달 80만 원이 나갔다.
서울 근교에 숙소를 세우는 게 현실적이었다. 이때부터 네이버 부동산에서 보는 범위가 늘었다. 광주, 양평, 평창, 여주 등 더 넓은 지역을 살폈다.
인터넷으로 보는 걸로는 한계가 있었다. 밥 먹을 때마다 본 EBS 건축탐구 집의 건축주들처럼 차를 끌고 땅을 보러 다녀야 했다.
장롱 면허에다 차도 없는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땅을 보러 다니려면 운전을 배워야 하는데 도무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땅이 날 찾아올 리 없으니 진전이 있을 리도 없었다.
오프라인 공간 모임 친구들과 만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한숨이 나왔다. 스스로가 재미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만날 때마다 전과 다를 바 없으니까.
출판전야를 준비할 때 좋아하는 일만 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그런데도 막상 하기 싫은 일을 마주하니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 스스로가 답답했다.
그만큼 간절하지 않은 건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간절하면 운전을 배워서 나갔겠지. 웬만한 사람들 다 하는 게 운전인데.
간절하지 않은 마음을 간절하게 만들 수는 없는 법이었다. 억지를 부려 잠깐은 행동할 수 있겠지만 지속되긴 어려웠다. 지금 지닌 마음으로도 몸이 움직일 수 있는 방도를 찾았다.
답은 단순했다. 출판전야를 작게 만드는 거였다. 처음부터 너무 크게 시작하려고 했던 걸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등에 지고 나아갈 수 있을 만큼 출판전야를 덜어내기로 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시험하며 점차 살을 붙여 가는 게 맞았다.
IT 업계에는 MVP라는 말이 있다. Minimum Viable Product의 준말로 한국말로는 최소 요건 제품이라 한다. 말이 어려운데, 아이디어가 시장에 먹히는지 시험하기 위해 최소한의 기능만 갖춰 만든 제품이라 보면 된다.
출판전야에도 MVP 방식을 도입하는 게 좋아 보였다. 출판전야의 핵심 기능만 먼저 만들면 준비 부담도 덜고 내 마음도 더 빨리 시험해 볼 수 있었다.
출판전야의 중심은 글쓰기다. 글이 잘 써지는 장소가 되는 게 출판전야의 목표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고독한 숙소를 만드는 걸 계획했다.
계획을 다시 살폈다. 고독은 필수 요건이라 생각되는데 숙소는 그렇지 않았다. 꼭 숙소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숙소를 전제로 하면 침실과 욕실이 붙어야 한다. 이 둘만 더해도 필요한 평수와 관리 지점이 늘어난다.
늘어난 평수만큼 토지 구매와 공사 비용이 커질 것이다. 침구류를 매번 새것으로 갈고 욕실 배수구에 쌓이는 머리카락도 청소해야 한다.
출판전야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서재만 있어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전야의 영혼은 서재에 깃들 테니까.
숙소가 아닌 서재인 출판전야를 떠올리니 일이 간결해졌다. 고민할 요소는 물론 비용도 확 줄었다. 평수가 10평 이내로 작아졌기 때문이다. 공간 컨설팅을 하는 친구에게 물으니 3,000만 원 정도면 인테리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숙소를 준비할 때는 인테리어 비용이 많이 나오니 임차로 하는 게 아까웠다. 결국 건물주에게 돌아갈 공간을 돈 들여 꾸미는 거니까.
3,000만 원 정도면 내가 가진 돈으로 충당할 수 있었다. 대출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부담이 덜했고 임차로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보증금과 인테리어 비용을 합치면 4~5,000만 원 정도가 될 거라 추측했다. 출판전야를 숙소에서 서재로 바꾸니 예산의 단위가 바뀌었다. 5억에서 5천만 원으로.
돈을 조금만 더 모으면 서울에서도 출판전야를 할 수 있다. 요원하게 느껴졌던 목표가 가깝게 다가왔고 그만큼 의욕이 생겼다.
선택과 집중을 하기로 했다. 서재라는 씨앗을 먼저 심고 그것이 어떤 결실을 맺는지 지켜보자. 만족스러우면 이어가고 그렇지 않다면 멈추자.
5,000만 원. 여태 한 번도 지출해 본 적 없는 큰돈. 그럼에도 내 마음을 시험하기 위해 지출할 만한 액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꿈의 가치가 아무리 못해도 5,000만 원은 넘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