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나는 조건들
아침 일찍 을지로로 향했다. 부동산 중개인 분께서 총 4개의 매물을 보여 준다고 하셨다. 출근 전까지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매물이 을지로, 충무로에 퍼져 있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운명처럼 다가온 인쇄소 앞 매물을 첫 번째로 찾아갔다. 을지로3가역에서 2분 정도 걸으니 도착했다. 대로변이 아닌 좁은 골목에 위치해서 마음에 들었다.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은 고독과 어울리지 않았다.
건물은 연식이 느껴지는 2층짜리 꼬마 상가였다. 낡긴 했지만 세월을 잘 머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2층에 올라가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계단을 오르니 좌측, 우측 그리고 전방에 하나씩 총 세 개의 방이 있었다. 그중 오른쪽 방에서 건물주 분이 서점을 운영하고 계셨다. 건물주가 직접 사용하니 건물이 잘 관리되는 듯했다.
건물주를 이웃으로 두는 게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인상이 선하시기도 했고 편하게 월세를 받는 선택지를 두고 서점을 운영하는 분에겐 낭만이 있을 거라 멋대로 추측했다.
더더욱이 곁에 인쇄소와 서점이 있다니. 글을 쓰고 인쇄하고 책을 팔고, 그야말로 삼위일체 아닌가. 매물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이었지만 확신이 부풀어 올랐다.
매물은 건물주 분의 서점 맞은편에 있는 방이었다. 1인 디자인 회사의 사무실로 쓰였다고 했다. 10평 정도의 공간으로 창도 이곳저곳에 나서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 출판전야가 들어서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했다. 기획서를 쓸 때 정리한 주요 요소, 예를 들어 책장과 책상이 어디에 위치하면 좋을지 가늠해 봤다.
아직 이전 임차인의 짐이 남아 있어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가 쉽지 않았지만 설렜다. 데이데이 팀에 보여 주기 위해 사진도 열심히 찍었다.
금액 조건도 훌륭했다.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65만 원. 간절히 바라니 딱 좋은 매물이 찾아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을 보기 전까지는.
다음 매물을 보러 가기 전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살폈다. 공용 화장실인 건 둘째치고 변기가 푸세식(재래식)이었다.
관리가 잘 되어 깨끗하긴 했다. 하지만 관리가 잘 되어도 푸세식은 푸세식. 나도 거부감이 드는데 출판전야에 올 손님은 오죽할까.
화장실의 상태를 알면 오려던 사람도 안 올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보조 시설이라 생각한 화장실의 위력을 체감한 순간이었다.
고운 비단처럼 펼쳐진 꿈에 오물이 엎어진 느낌. 마음을 가득 채웠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푸세식 화장실만 남았다.
나머지 매물에 희망을 걸었지만 다 성에 차지 않았다. 건물이 관리가 잘 되는지 보려면 화장실을 살피라는 한 건물 관리인 분의 말씀만 기억에 남았다.
을지로 매물 투어가 끝나고 부동산 중개인 분에게 미안했다. 돈 한 푼 드리지 않았는데 한 시간 동안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다녀 주셨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매물을 구하는 일이 꼭 애인을 찾는 일 같았다. 백 가지가 마음에 들어도 한 가지가 내키지 않으면 도루묵이었다.
을지로를 다녀온 후 부동산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첫 번째 매물의 건물주 분이 화장실을 고쳐 준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듣고도 화장실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화장실 문제를 곱씹다 보니 깊게 들어가게 됐다.
푸세식 변기에서 시작된 고민은 공용 화장실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공용 화장실은 괜찮은가? 밤늦게까지 이용하는 출판전야에서 위험하지 않으려나?
위생의 문제에서만 화장실에 접근해서는 안 됐다. 출판전야는 혼자 사용하는 곳인 만큼 치안도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했다.
화장실은 치안 문제에서 가장 취약한 곳이다. 밤늦은 시간 혼자 공용 화장실을 사용하면 무서울 것 같았다. 결국 출판전야의 화장실은 양변기를 갖춘 전용 화장실이 되어야 했다.
더 나아가 밤늦은 시간까지 머무는 걸 고려하니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을지로에서 늦은 시간까지 출판전야를 이용한 사람은 집에 어떻게 갈까.
을지로 일대엔 눈에 띄는 아파트나 빌라가 없었다. 네이버 지도를 봐도 을지로는 상업/업무 지구였다. 퇴근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곳, 늦은 밤엔 야근하는 직장인이나 휘청이며 택시를 잡는 취객 정도만 남는 곳이었다.
거리에 인적이 뜸하면 귀갓길이 무서울 테고 막차가 끊기면 웬만해선 택시를 타야 한다는 게 아쉬웠다. 택시비가 아까워 12시 전에는 집에 갈 것 같았다.
막차 시간에 쫓겨 출판전야를 나서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적길 바랐다. 이 점에서 을지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을지로 대신 망원과 성수를 살폈다. 두 곳은 거주 지역과 상업 지역이 섞여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출판전야를 이용하다 집까지 걸어가는 그림이 그려졌다.
출판전야의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손님이 조금이라도 살 법한 지역을 살피기로 했다. 가능성 0%와 1%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
망원과 성수 쪽 부동산에 전화를 돌려 원하는 조건을 말했다. 전용 화장실 조건을 포함해서인지 마음에 드는 매물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망원이 의외였다. 예술가의 동네라고 들어 온 곳이라 월세가 상대적으로 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미 젠트리피케이션이 되었는지 임대료가 만만치 않았다.
망원 쪽 부동산에선 조건에 맞는 매물을 찾았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망원, 성산 쪽에 출판사와 작가가 많아 집에서 멀어도 욕심이 났는데 아쉬웠다.
전설의 포켓몬을 찾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통화한 부동산 중개인 분들은 매물 조건을 듣고 전화 너머로 난색을 표했을지도 모른다.
희망을 잃어가고 있을 때 성수에서 마음에 드는 매물을 찾았다. 보증금/월세도 예산 안에 들어왔고 무엇보다 전용 화장실이 있었다.
바로 부동산에 전화해서 물었는데 권리금이 있었다. 보증금보다 큰 권리금 액수를 듣고 마음을 접었다. 권리금은 돌려받지도 못하기에 부담이 컸다.
설레는 마음이 금세 시무룩해졌는데 부동산 중개인 분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금액 조건이 안 맞긴 한데 꼭 보여 주고 싶은 매물이 뚝섬역 인근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가장 중요한 금액 조건이 안 맞으면 봐서 뭐 하나 싶다가도 중개인 분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걸어 보기로 했다. 전화를 끊고 뚝섬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