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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Woo Lee Apr 13. 2024

이상형

운명 같은 만남

중개인 분의 확신에 찬 제안에 뚝섬으로 향했다. 중개인 분은 역 앞에서 만났을 때부터 나에게 딱 맞는 매물일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다.


매물 찾기에 지쳐 있던 터라 여전히 회의감이 있었다. 마음에 들어도 가격 때문에 안 되겠지라는 생각을 갖고 중개인 분의 뒤를 따랐다.


매물이 있는 상가는 2층 구옥 빌라를 4층으로 증축한 건물이었다. 한 층에 하나의 호실만 있고 아직 입주한 가게는 없었다. 이번에 새로 올린 4층이 우리의 목적지였다.


건물 앞에 서니 설렘의 불씨가 다시 지펴졌다. 붉은 벽돌 건물이 클래식하면서도 아늑한 매력을 풍겼다. 세월을 머금은 붉은 벽돌 위로 갓 구운 붉은 벽돌을 쌓아 올렸다. 옛 모습을 보존하며 새 단장한 온고지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건물이 괜찮으니 찾아온 길도 돌아보게 됐다. 뚝섬역이랑 도보 5분 이내로 가깝지만 대로에 접하지 않아 조용했다. 근처에 성수, 서울숲도 있고.


기대되는 마음을 안고 4층에 올랐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라 걸어 올라가야 했다. 이 점이 단점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푸 투안의 책 <공간과 장소>에서는 아래와 말한다.

승객들은 좌석에 안전하게 벨트로 고정된 채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수동적으로 운송됩니다.
(제트 여객기는) 그저 사치스러운 운반용 상자일 뿐입니다.


책에서는 여객기를 얘기하지만 엘리베이터도 운반용 상자와 다를 바 없다. 엘리베이터 또한 주위 환경이 바뀌는 과정을 생략한다.


몽상가가 수동적으로 출판전야에 옮겨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센이 직접 '터널'을 지난 것처럼, 몽상가 또한 이세계로 전이하는 과정을 온전히 경험하길 바랐다.


계단은 '터널'의 역할을 수행했다. 오르는 행위는 일상을 의미하는 지상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층계를 오르며 눈높이와 주변의 풍경이 달라지는 걸 느낀다.


디지털 경험(엘리베이터)은 편리하지만 아날로그(계단) 경험만큼의 설득력은 없으니까. 숨을 헐떡이며 계단을 올랐지만 여행처럼 느껴졌다.


4층에 도착하니 조그만 테라스가 붙어 있는 매물이 보였다. 한 층을 혼자 쓸 수 있는 것도 좋은데 테라스까지 있다니. 상상도 못 한 옵션이었다.


또 탑층이라 공용 옥상을 편히 오갈 수 있었다. 주변 전망이 탁 트여 글 쓰다 기분 전환하러 나오기 좋아 보였다.


이때부터 반쯤 홀린 상태로 매물을 살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8평 정도의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혼자 쓰기 딱 알맞은 크기였다.


신축이라 깔끔한 건 물론이고 창도 여기저기 크게 나서 개방감이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든 건 실내에 전용 화장실이 있다는 점이었다.


나의 이상형이 실존하다니. 내가 고민한 부분을 한 번에 해결해 주는 매물이었다. 중개인 분이 확신을 갖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금액 조건이었다. 보증금 3,000만 원에 월세 75만 원. 월세는 가능한 범위 안에 들어왔지만 보증금은 최대 예산 1,500만 원의 두 배였다.


매물이 마음에 들어 2,000만 원까지는 무리를 해 보려 했지만 3,000만 원은 감당이 안 됐다. 나보다 먼저 보고 간 손님도 보증금을 보고 발길을 돌렸다고 했다.


총예산이 5,000만 원인데 보증금에 3,000만 원을 쓰면 2,000만 원이 남았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내 구상을 실현하기엔 충분하지 않은 돈이었다.


그래도 포기하기 싫었다. 이미 이상형을 봤기에 다른 매물을 보더라도 눈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내부를 다 둘러봤지만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들은 보증금과 월세를 교환할 수 있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마침 월세는 75만 원으로 생각보다 괜찮았다.


중개인 분에게 월세를 20만 원 올리는 대신 보증금을 2,000만 원 낮출 수 있는지 여쭤봤다. 중개인 분은 협상은 가능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문제가 있다고 했다.


내가 하려는 서재가 공간 대여 사업이라 임대인이 선호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몰랐는데 공간 대여는 건물을 손상할 우려가 있어 임대인 입장 비선호 업종이었다. 아무래도 무인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아 사건 사고가 많은 듯했다.


출판전야는 파티룸처럼 여럿이 모여 술을 마시는 곳이 아니다. 혼자 사용하는 서재에서 파티룸 같은 난장이 벌어질 리 없어 보였다.


이 점을 중개인 분에게 말씀드렸고 나름 건실한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깨알 어필도 했다. 월세는 월급을 털어서라도 낼 거라 밀릴 걱정은 없다고 하며.


간절함이 눈에 보였는지 중개인 분이 임대 관리인에게 전화를 한번 해 보겠다고 말씀하셨다. 임대 관리인 분을 통해 임대인을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중개인 분이 통화하는 동안 매물을 구석구석 살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이곳에는 비단결 같은 내 꿈을 얼룩지게 할 무언가가 없었다.


그렇게 꿈에 빠져 있던 중 중개인 분이 통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임대 관리인 분이 임대인과 논의해 보는 걸로 이야기가 됐다고 했다.


그날은 아쉬운 마음을 안고 나의 이상형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중개인 분이 준비한 뚝섬의 다른 매물을 보러 갔는데 역시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이상형이 눈에 밟혔다. 매물을 둘러볼 때 찍은 영상을 돌려보며 여기엔 책상 저기엔 책장을 놓으면 되겠다 하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을까. 중개인 분에게 전화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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