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lflower, 2012
Patrick: You see things, you understand. you are wallflower.
난 말이 많은 편은 아니다.
먼저 나서서 어제오늘 겪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성격이 못 된다.
대화 최전선이 매우 높아 웬만한 주제가 아니고서는 내 입을 통과하지 못한다.
통과하지 못한 언어들은 헐벗은 글이 되기도 하고, 어딘가에 갇혀버리는 고독한 글이 되기도 하고, 혹은 어떠한 형태의 언어도 되지 못한 채 진눈깨비처럼 흩어지기도 한다.
내세울만한 장점은 아니지만, 사실 난 나의 이런 점도 좋다.
내 안에 이런 벽이 있다는 것이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허물어 없애고 싶진 않았다.
그 벽 안에 들어가면 꽤 포근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침묵의 외로움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할 수 있었다.
누군가와 풀지 못한 응어리들은 늘 내 안에서 무겁게 침전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두 어깨 위에 짊어져야 할 바위가 아니라, 적당히 무르고 단단한 밑바닥이 되어주었다.
알 수 없는 나락으로 영영 떨어지지 않게, 불행의 하강을 막아줄 땅이 되었다.
다른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는 것보다 차라리 철저히 혼자가 되어 고독함을 즐기는 것이 더욱 편했다.
남들은 찾지 않는 고요한 사막에선 나를 느낄 수 있었다.
밑바닥 위에 누우면 하늘을 한눈에 담을 수도 있었다.
바닥과 하늘, 그 사이에 오롯이 나 홀로 있음을 느끼면 나는 혼자가 아니라 단 하나의 중심이 되었다.
그때 비로소 나 자신 그대로일 수 있었다.
하지만 말이 없는 성격은 타인에게 말이라는 무기로 공격받기 쉬운 것이었다.
특히나 요즘 같이 별 할 일 없이 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에게는 더욱 그랬다.
"요즘 뭐해?"라는 질문은 한 장의 종이 같았다.
얇고 부드러워 전혀 조심스러울 필요가 없는 형체 이건만, 가끔 그것은 날카로움이 되어 손가락을 베어버리곤 한다.
질문 자체는 전혀 날카로울 의도가 없는 물렁한 말이지만, 나에게는 굳게 닫은 입을 열게 만들려는 무기처럼 날아오는 것이다.
대체로 요즘 뭐하냐는 질문은 쳇바퀴 같은 삶이나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하루들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
대화의 최전선을 넘기에 최근 나의 하루 속 '무언가'들은 너무나도 사소했다.
따라서 그럴 때마다 "아무것도 안 해"라고 하지만, 나 스스로도 이 말이 적절한 대답이 아님을 안다.
세상에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대답한 이후로는 정적이 흐르고 만다. 가끔은 '요즘 힘든 일 있냐', '힘내'라는 위로의 말을 듣기도 한다.
역시나 지루한 하루 일과들을 늘어놓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상은 어떠한 성과도, 보람도 없어 위로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영화 '20th century women'에서 "행복한지 따져보는 건 우울해지는 지름길이야"라는 대사가 나온다.
외로운 나의 생활을 최대로 즐기고 있는 요즘을 위로받다 보니, 내가 정말 위로받아야 하는 건가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스스로에게 행복한가 물었더니 '딱히'라는 대답을 듣게 되었다.
딱히 행복한 건 아니라고 느끼자, 불행하다는 결론이 나버렸다.
섣부른 위로는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다 영화 'wallflower'에서 등장인물이 친구에게 건넨 말에 얼떨결에 '진짜' 위로를 받아버렸다.
사랑하던 이모가 교통사고로 죽고, 가장 친한 친구가 유서 없이 자살하는 등 상처가 많은 찰리는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찰리가 처음으로 용기를 내 말을 건 패트릭은 그 용기에 보답해 줄 소중한 행운이었다.
패트릭은 친구가 없던 찰리에게 손을 내밀며,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You see things, you understand. You are wallflower."
찰리의 인생에 패트릭이 나타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부럽기까지 했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말없이 친구들을 바라봐주는 것이 찰리가 그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패트릭은 알아주었다.
사람들은 각자만의 시선과 이해의 방식을 갖고 있다.
우정이나 사랑이라는 이유로 그 시선과 방식을 서로에게 맞출 필요는 없다.
우정과 사랑은 감정의 일환으로, 지극히 개인의 일부이다.
따라서 개인의 방식에 따라 그 형태가 다르고, 변화한다.
다른 모양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떠나야 할 뿐이다.
관계라는 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둘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각자의 모양과 색이 더욱 뚜렷해져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 해서 나의 모양을 유지하면서 관계를 쌓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사람들 틈에 있게 되면, 알 수 없는 힘에 이리저리 휘둘린다.
만나는 사람마다 변화하는 나를 바라보다가 집에 홀로 돌아와 공허함을 느낀 적이 있다.
어딜 가든 잘 적응하는 사람인 것 같다가도, 어딜 가든 나였던 적이 없는 사람 같기도 했다.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애쓰다가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하기도 하고, 오히려 해야 할 말들을 놓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방금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미안해"라는 말을 많이 놓친다.
그래도 내가 운이 좋았던 건지, 아직 나도 좋은 사람인 건지 내 주변엔 늘 곁에 있어주는 소중한 친구들이 있다.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산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인연이라는 건 꼭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들 덕분에 나에 대해 늘 생각하게 되었다.
소중하다느니, 사랑한다느니의 낯간지러운 말은 못 하지만, 함께한 세월이 어느새 두둑이 쌓인 것을 보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을 이어나가는 나만의 방식이 있는 것이라고, 그냥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말이다.
We can't choose where we come from, but we can choose where we go from there.
영화 'wallflower'에서 나오는 다른 대사를 인용해보자면,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 오는지 선택할 순 없지만, 어디로 향할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난 외로움이 없는 곳에서 오진 못했지만, 외로움과 함께 나아가기로 선택했다.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을 갖고, 그 시간을 충분히 느끼고 즐길 때 난 나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
책을 읽으며 생각하고, 영화를 보며 느낀다. 그리고 이렇게 그 감정들과 기억들에 대해 글을 쓴다.
앞에서 말했듯, 외로움은 내가 타고난 기질이지만 그것이 날 불행하게 한 적은 없다.
지난 세월의 긴 실험이 그것을 증명해주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의 이름을 모를 때부터, 그것은 이미 나의 일부였다.
어릴 때 엄마의 자랑은 집에 내가 혼자 있어도 울지 않고 잘 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귤을 따야 하는 시기에는 밭에 데려가서 자리만 정해주면, 그곳에서 혼자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연기도 하며 누구보다 시간을 잘 보냈었다고 기특해했었다.
외로움은 나에게 결핍이 아니라, 그저 0℃인 상태이다.
녹는 것에 익숙한 얼음도 온도가 0℃일 때는 자신의 모양을 유지해낸다.
나는 어떤 것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온전히 나일 수 있는 상태, 0℃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방황의 시기는 온다.
그로 인해 우울할 수 있고, 분노할 수도 있고, 좌절할 수도 있다.
그러한 감정들을 한 번에 풀어버리지 않아도 된다.
'실마리'는 실의 머리라는 뜻이라서 '실마리를 찾다'가 옳은 표현인데, 우리는 종종 '실마리를 푼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엉킨 실들을 단번에 풀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실마리를 찾는 시작의 과정을 가리고, 결과만을 바라보게 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 간절함은 오히려 시작점을 잃어버리게 한다.
다시 말하자면 '실마리'를 찾는 걸 시작해야 실뭉치를 풀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건, 그리고 할 수 있는 건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그 감정들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하면 새로운 길이 나온다.
그 길이 모든 문제의 해결을 보장해주진 않지만, 한 걸음을 들어 올리게 해 줄 것이다.
걸음을 떼는 것만으로 우리는 충분하다.
정해진 길은 없기 때문에, 걸음을 뗀 방향이 곧 우리의 길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