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두 블록만 더 가면 된다고 했다.
주원은 핸드폰을 쥔 손을 초조하게 그러모은 채, 뒤쫓아오는 세 명의 친구들을 애써 무시하는 듯 종종걸음을 걸으며 앞서나갔다. 주원은 핸드폰 옆면에 달린 버튼을 눌러 켜진 화면을 잠시 내려다보고는, 다시 핸드폰을 품 안에 안고 걸음을 재촉했다.
"야, 여기 맞아?"
숨을 헉헉거리며 주원의 그림자 끄트머리를 밟고 따라오던 이서는 이내 볼멘소리를 내었다. '야, 어디까지 가. 힘들어 죽겠어.' 세미도 종아리까지 차올라와 넘실대는 잡초들을 손으로 툭툭 털어내며 한 마디씩 보태었다. 주원은 이들의 말끝에 찔린 듯이 화들짝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다시 핸드폰을 여러 번 켰다 끄더니, 노란 말풍선이 붕붕 떠 있는 화면을 엄지손가락으로 쉴 새 없이 두들기기 시작했다.
야
야
야
?
우리 다 왔는데
니가 가란대로 갔는데 안나옴
어디야
ㅋ진짜 감?
장난이면 죽여버린다
ㅋ
아 어디냐고
주원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1이 사라진 채팅방에는 더 이상 아무 글도 올라오지 않았다.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지금 되돌아가더라도, 171번 막차를 아슬아슬하게 탈까말까한 시간이다. 발밑이 어디를 딛는지도 모르고 억세게 자란 잡초들을 꾸역꾸역 짓밟으며 오던 길을, 빙판길 미끄러지듯 내달려야 겨우 자정 전 집에 도착할 것이다. 삐빅거리는 도어락 소리, 깨금발로 걸어도 둥둥거리는 마룻바닥 소리에 겨우 든 잠에서 깨어나 '쌍년이, 어딜 갔다 기들어오냐', 가래를 긁어 뱉어대듯 험한 말을 쏟아낼 할아범이 눈에 선명했다. 지금이라도 되돌아가야 한다. 주원은 짐짓 결심을 한 듯, 툴툴거리며 청바지에 붙은 풀떼기와 거미줄을 발작하듯이 떼내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없나 봐."
"아, 씨발."
이서가 인상을 확 구겼다. 이서는 땀이 맺힌 이마 위에 딱 달라붙어 있는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시원한 이마에 주름이 서너 개쯤은 잡혀있다가 펴지기를 반복했다. 이서는 납작한 콧등을 한껏 찡그렸다.
"씨발, 더워 죽겠네."
이서의 속절없이 내뱉는 욕설을 듣는 세미도 뒷목에 흥건한 땀을 연신 닦아내고 있었다. 짜증이 솟구치기는 세미도 마찬가지였다. 세미는 작은 눈에 맺힌 땀을 열심히 닦아내며, 곱슬기가 심해 부풀어 오른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는 시늉을 했다. 밤에도 채 식지 못하고 땅 위에 서려있는 뜨거운 기운이 자꾸만 머리 위로 솟구쳤다. 세미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지영은 짧은 단발머리를 손 빗으로 두어 번 쓸어 넘기고는, 밖으로 뻗쳐있는 머리카락을 한 손가락으로 휘휘 돌리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세미는 그런 지영의 콧김을 느끼며, 괜히 곁눈으로 지영을 흘겨보았다. 세미는 늘 지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원의 꼬드김에 넘어가 '나비펜션'에 가보자며 아무도 없는 학교 운동장에 검은 먼지처럼 모여있을 때도, 지영의 태도는 지금과 같았다. 촌극을 여유롭게 지켜보는 관람객 같은 느낌. 마지막 대사가 끝나자마자 마이크를 들고, '제 점수는...' 운운하며 별 1개를 슬며시 눈앞에 던져둘 것만 같은 파리함. 어쩐지 세미는 오늘따라 지영이 더 낯설었다. 그 옆에서 마치 화난 황소처럼 욕으로 투레질을 하는 이서보다 더 낯설었다.
이내 띠링-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주원의 핸드폰에 눈이 멀 것 같은 섬광이 번뜩였다. 그 섬광은 주원의 눈동자에 반사되어, 황급히 채팅방을 열어 타자를 치는 주원의 손가락이 그 눈동자에 고스란히 비쳐 보였다. 꼭 투명한 거울을 눈에 담고 있는 듯 네모난 화면이 그녀의 눈 정중앙을 가득 메워, 꼭 그녀의 안광 같아 보이기도 하였다. 한참을 리드미컬하게 엄지손가락을 두들기던 그녀는 빨려 들어갈 듯 노려보던 휴대폰 화면을 얌전히 내려놓고, 짐짓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이쪽으로, 좀 더 가면 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