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인처럼 시간 보내기
오전을 투자해서 밀렸던 빨래를 처리했다. 여행이 길어지다 보니 빨래가 새로운 일이 된다. 마침 뮌헨 숙소에는 코인 세탁기도 있으니 모아놨던 빨래를 한 번에 돌렸다. 빨래를 돌리는 동안 짐도 정리하고, 수인이 기저귀도 확인하고, 추가로 사야 할 것들도 정리했다. 마치 한국에서 늘 마주하던 주말과 같은 느낌이다. 단지 장소가 독일로 옮겨졌을 뿐. 아빠와 엄마가 일을 하는 동안 수인이는 아기 침대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자 감옥에 갇힌 것 같은 상황이 연출돼서 한참 웃었다. 수인이는 아직 말을 못 하기 때문에 우리가 가상으로 수인이 역할을 할 때가 많다. 그럴 때 수인이는 늘 호통치는 캐릭터가 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왜 이런 곳에 가둬놓는 것이냐. 답답하다! 얼른 꺼내 달라!"
"이 엄마 아빠가, 얼른 꺼내지 못하겠느냐!"
"나랑 놀아주지 않고 뭐하는 것이냐!"
이런 말을 하며 깔깔대며 웃었다. 수인이는 우리가 하는 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침대 안에서 이런저런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뒹굴뒹굴하다가 하며 잘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정리도 금방 끝났다. 선물로 과자 사줘야겠네. 건조기까지 돌려서 보송보송하게 마른 빨래를 정리하고 나니 기분이 개운하다.
빨래를 마치고는 수인이 기저귀와 우리 먹을거리를 사러 나섰다. 뮌헨은 아무래도 뉘른베르크보다 큰 도시고 더 잘 사는 도시라 물가가 살짝 비싸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서울의 물가와 비교하면 훨씬 싼 편이다. 특히 아이용품이 굉장히 싸고 질이 좋다. 새로운 기저귀로 바꿨지만 수인이도 기저귀 발진이나 기타 부작용 없이 잘 적응하고 있고, 물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탈 없이 잘 지낸다. 독일로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우리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물가가 좀 안정됐으면 좋겠는데. 몇 년 사이에 서울의 생활 물가는 미친 듯이 올라서 이제는 생활필수품이나 외식 등의 물가가 독일보다 더 비싼 수준이 되어버렸다. 에효.
뮌헨에는 잉글리시 가든이라는 큰 공원이 있다. 전에 도전해 보려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못 갔던 곳인데 이번에야말로 도전해봤다. 독일에 왔을 때부터 흐리고 쌀쌀한 날씨는 여전했지만 그래도 공원이 너무나도 좋아서 모든 것이 용서가 됐다. 특히 부쩍 더해진 가을의 정취 덕분에 더 운치 있고 좋았다. 어딜 가나 원래 공원을 좋아했지만 수인이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된 뒤로 공원이 잘 되어있는 곳이 더욱 좋아졌다. 걷고 또 걷고, 군데군데 좋은 곳에서 가족사진도 찍고. 이런 게 진짜 여유로운 산책이 아닐까.
중간에 야외에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멋진 곳이 있는데 아쉽게도 그곳은 추운 날씨 때문에 닫혀 있었다. 아쉬움은 아쉬움으로 남겨놔야 다음에 또 올 수 있겠지. 수인이가 좀 크면 다시 와서 즐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땐 기왕이면 좀 따뜻할 때로. 앞날은 모른다. 신혼여행 때만 하더라도 아이까지 함께 뮌헨에 다시 오게 될 줄 누가 알았나. 그래서 이제부터는 작은 바람이라도 소중하게 기억하고 간직해야겠다.
뮌헨은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 방문이다. 이전에는 나 혼자 세 번, 신혼여행으로 한 번. 그렇다 보니 특별히 무언가를 봐야 하고 특별히 스케줄을 짜고 하는 부담감이 전혀 없었다. 덕분에 뮌헨에 있는 내내 굉장히 여유롭게 현지인처럼 생활할 수 있었다. 빨래도 하고, 생활필수품 쇼핑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 관찰하고 등등. 아이와 함께 다니면 욕심을 많이 부릴 수 없게 되는데 이럴 때는 오히려 전에 와본 도시가 이렇게 더 좋기도 하다. 내가 현지인이 된 것 같은 즐거운 착각이 들기도 했다.
서울에 산 지 벌써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서울 곳곳엔 새로운 것들이 많다. 뮌헨도 마찬가지다. 다섯 번째지만 기존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것들이 새롭게 보였다. 그래서 여유롭게 보냈지만 전혀 지루하거나 하지 않았다. 한두 번 갔다고 도시를 충분히 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어렸을 때는 늘 새로운 곳들을 찾아다니곤 했는데 이제는 익숙한 곳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는 것이 더 좋아지고 있다. 아마도 전보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만, 그런 모습이 싫지는 않다.
수인이도 몸이 편안한지 뉘른베르크에서보다 더욱 잘 놀았다. <개구리가 폴짝> 책은 질리지도 않는지 계속 보고, 과자를 오물오물 거리며 돌아다니기도 잘 한다. 몸도 여유롭고, 마음도 여유롭고, 진짜 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비록 순간순간 수인이를 챙겨야 하는 시간들이 있긴 하지만. 이대로 한 6개월쯤 시간이 훌쩍 흘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