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보러 후쿠오카로 출발
"봄도 다가오는데 벚꽃 보러 일본이나 갈까?"
"뭐?"
내 제안에 아내는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이 사람이 가을을 독일에서 보내더니 정신이 이상해졌나 이번에는 갑자기 웬 일본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약 2개월 후, 후쿠오카행 비행기를 탔다. 제안했으면 실행해야 하는 거다. 어차피 여행은 그 자체가 일탈, 하나하나 따지고 있으면 가지 못한다. 생각이 났을 때 과감하게 실행해야 갈 수 있다. 후쿠오카 여행은 순전히 내 즉흥적인 제안 때문이었다.
언제나처럼 서울역에 가서 체크인을 하고, 직통 열차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가서 시간을 보내다가 비행기를 탔다. 수인이는 이제 돌이 지나고도 4개월이 더 지났다. 그래도 아직 걷지 못한다. 걸음이 느린 아이. 사실 모든 것이 느린 아이. 아직 말도 못 한다. 느리면 어떤가, 예쁘고 건강하면 됐지. 독일에 갈 때와 마찬가지로 배시넷을 신청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배시넷에 눕지를 못했다. 수인이는 어느새 배시넷에 눕기엔 무리인 아이가 되어 있었다. 확실히 컸구나 우리 딸.
후쿠오카까지 비행시간은 2시간 이내로 매우 짧다. 11시간 가까이 갔던 프랑크푸르트에 비하면 엄청 쉽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비행이 더 힘들었다. 독일에 갈 때 수인이는 이제 본인의 자아가 점점 생겨나기 시작하던 어린아이였다. 그래서 그런가 큰 어려움 없이 아빠 엄마의 뜻에 따라 시간을 잘 보냈다. 그런데 돌이 지난 수인이는 좋고 싫음이 제법 명확한 아이가 됐다. 배시넷에 앉아 있을 때는 그나마 잘 놀았는데 잠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거나 하면 칭얼대며 아빠와 엄마를 난감하게 했다. 게다가 스마트폰을 아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의식적으로 거의 안 보여주는 편이긴 하지만 가끔 가다가 수인이 동영상을 함께 보곤 했는데 어느새 그것에 익숙해져 버렸는지 이륙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본인의 동영상을 보여달라고 난리였다. 자기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재미있을까? 아니, 그 모습이 자기라는 건 알까?
잠깐 책을 보다가, 배시넷과 자리를 옮겨가며 놀아주다가, 결국 스마트폰도 잠깐 보여주다가, 안고 돌아다니다가 하며 힘든 2시간가량을 보냈다. 걷지 못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걸었으면 더 심각했을 텐데. 앞으로는 수인이와 비행기를 탈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준비를 잘 해야겠다. 당장 돌아갈 때가 걱정이다.
어쨌든 후쿠오카에 잘 도착했다. 시내로 와서 미리 예약해 놓은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근처의 우동집에 가서 우동을 한 그릇 먹었다. 역시 일본에 오면 우동을 먹어야 한다. 숙소 근처에 저렴하면서도 꽤 유명한 곳이 있어서 상당히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 비는 오지 않지만 날씨가 흐려서 살짝 아쉬웠는데 우동 덕분에 우리 모두 기분이 좋아졌다.
후쿠오카에서 목적지는 딱 한 곳이다. 바로 후쿠오카 성터. 벚꽃 시즌이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는 곳이라고 했다. 수인이와 함께라면 무조건 산책하기 좋은 곳이 최고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꽃놀이야말로 아이와 함께 하기에 가장 좋은 여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하철에서 내린 후 일본의 거리를 느끼며 천천히 걷다가 유모차를 살짝 보니 수인이는 어느새 잠에 빠져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여유롭게 일본의 벚꽃을 즐겼다. 수인이가 잘 때는 최대한 잘 자게 둬야 한다. 그래야 얼마 없는 아빠 엄마의 자유시간이 생기고, 수인이도 덜 칭얼거린다. 부부 셀카도 찍고, 잠깐 서서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니 신혼부부가 된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어이구, 고마워 수인아. 비행기에서 칭얼댄 걸 이렇게 갚는구나.
벚꽃은 대단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온 세상이 벚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런 곳을 걸을 때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기분이 좋아진다. 눈이 호강하는 느낌, 이 맛에 꽃놀이한다! 신기했던 건 일본 사람들이 벚꽃을 즐기는 문화였다. 본격적으로 후쿠오카 성터(사실은 공원이라고 하면 맞을 듯)에 들어가니 벚꽃 나무 아래 여기저기에 돗자리가 많이 깔려 있었다. 빈 돗자리도 있고, 사람들이 있는 돗자리도 있고 하는 것을 보면 어떤 개인이 깔아놓은 것 같지는 않았다. 알고 보니 주로 걸으며 벚꽃을 즐기는 우리와 다르게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기도 하며 벚꽃을 즐기는 것이 일본 문화라고 했다. 회사에서도 자주 오기 때문에 아마 빈 돗자리들은 미리 맡아놓은 단체용 돗자리가 아니었을까. 벚꽃이 피는 시즌이 일본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의미 있고 기다려지는 시기라던데 그 말을 실감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중간에 높이 올라가는 부분이 있기에 나 먼저 올라가 봤다. 별 기대 없이 올라갔는데 그곳에서 본 주변 모습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벚꽃의 바다'가 있다면 바로 이 곳이 아닐까 싶었다. 고개를 이리 돌려도 벚꽃, 저리 돌려도 벚꽃이었다. 이 순간 후쿠오카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쟈기, 얼른 올라가 봐. 안 올라가면 정말 후회한다. 수인이는 여기서 내가 데리고 있을게."
한참 감탄하다가 내려와서 아내와 바통 터치를 했다. 아무래도 오래된 좁은 계단이라 유모차를 가지고 올라가기는 힘들다. 수인이에게도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괜한 욕심인 것 같아 그것은 포기했다. 아쉽지만 넌 아래에서 많이 보렴.
엄마가 벚꽃을 구경하러 계단을 올라간 사이에 수인이가 잠에서 깼다. 멍한 표정으로 잠깐 정신을 찾더니 곧 기분이 좋아졌다. 푹 잘 잤나 보다. 이때부터는 수인이에게 벚꽃을 알려줬다. 겁이 많은 수인이는 처음 보는 꽃을 만지기를 역시나 주저한다. 그래도 사방에 널려있고 아빠 엄마도 좋아하니 싫지는 않은지 나중에는 관심을 보였다. 보들보들 꽃잎을 만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수인이가 얼른 말을 했으면 좋겠다.
수인이가 잘 놀아준 덕분에 해가 질 무렵까지 벚꽃을 마음껏 즐겼다. 이번 여행의 메인 테마는 2가지, 벚꽃과 온천이다. 1가지를 잘 마쳤으니 절반은 이미 성공한 건가. 수인이는 일본에서도 역시나 잘 논다. 기특한 것. 꽃보다 네가 더 예쁘단다. 아빠와 엄마는 딸바보라 어쩔 수 없나 봐.
숙소로 돌아가려고 밖으로 나왔는데 재미있는 곳이 열리고 있었다. 조명이 어우러진 벚꽃 나무 아래에 일본 만화에서 많이 보던 포장마차들이 펼쳐져 있었다. 중간에는 테이블이 있어서 먹고 갈 수도 있는 그런 작은 먹거리 축제랄까. 인형 뽑기도 있고, 자석 낚시 같은 것도 있고, 던져서 상품 얻는 것도 있고, 당연히 먹을거리들도 있고.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많이 보던 그런 모습인데 직접 눈 앞에 펼쳐지니 진짜 일본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났다. 신나서 우리도 자리를 하나 잡고 야끼소바와 오코노미야끼를 시켜봤다. 솔직히 맛은 그냥 무난했지만 분위기가 모든 것을 흐뭇하게 만드는 그런 곳이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에서 즐기는 이런 야식이라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좋다, 벚꽃 핀 후쿠오카.
좋다, 우리 가족만의 여유로운 꽃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