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_ 05. Flight to Denmark
언젠가 엄마 제사상에 놓을 전을 부칠 때였다. 커다란 원형 전기 프라이팬에 밀가루를 묻히고 계란 물 입힌 두부를 죽 돌려놓고 열심히 속도를 올리는데, 익어가는 순서대로 뒤집어 가며 나름 심혈을 기울였는데도 한판 가득 부쳐진 전 중 한두 개 정도는 조금 타버리고 말았다. 이런저런 전이 대소쿠리 가득, 노릇노릇 알맞게 부쳐졌지만 개중 일말의 실패가 생기고 만 것이다. 타버린 전을 먹어치우며 ‘역시 나름 열심히 한다 해도 힘에 부치면 안 되는 것이 생기는구나!’ 소소한 느낌표를 찍었다.
넷째 외삼촌은 딱 이런 망작이 되어버린 전 같은 존재였다. 일곱 남매 건사한다고 해도 외할머니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놓인 것 같은 멍든 손가락 같은 자식. 그는 열네 대 살부터 사고를 치고 다니다 고등학교 입학도 하지 않고 집을 나가버렸다. 그래서 어릴 때도 이 넷째 외삼촌만큼은 제대로 본 적이 없었는데,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에 사건의 단초를 심는 존재가 되며 나타난 것이다.
어느 날 마루 한편에서 놀고 있을 때, 대문을 열고 들어 온 둘째 이모가 문을 열고 들어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엄마와 얘기를 시작했다.
“어제 기수가 사거리 시청 근처에 갔다가 형부를 봤는데 어떤 여자하고 있더래. 둘이 웃고 있는 게 그냥 아는 사람 같지 않았다는데!”
아빠는 엄마가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한 것에 대해 나름의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엄마가 남긴 두 장의 유서에도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장고의 시간 끝에 아빠가 내린 결론은 산후우울증 때문.
지나 온 시간을 되돌리며 근간의 일들을 비추어 생각해 봐도 엄마가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할 만큼의 근거를 알 수 없었던 아빠는 ‘대체 네 엄마는 왜 그랬을까?’라고 혼잣말처럼 묻기를 반복하다 결국엔 주변에서 알아차릴 새도 없이 우울증이 깊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의 죽음에 대해 이유를 모르겠다는 이런 아빠의 태도는 합당한 것일까? 외가 식구들이 따져 묻거나 하지 않았던 것인지 또 아니면 알고도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빠는 외삼촌의 입으로 일러바쳐진 당시의 그 일련의 일은 모르는 듯했다. 아니 알았다 해도 그 일은 일말의 가치도 없는 너무도 사소한 오해였다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니 스스로는 엄마의 급작스러운 죽음이 미치도록 납득이 안 가는 것이었다.
갑자기 처와 자식을 동시에 잃은 남자가 곧 죽을 것 같은 상실감을 보이며 의문을 던지는데 아무도 ‘거기엔 당신 탓도 있는 것 같은데요’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는 모두가 아빠를 몰아붙이기에 앞서 엄청난 결과를 몰고 온 현실에 자기 몫의 책임을 느껴 입을 닫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퀘니히스베르크의 칸트처럼 오후 7시면 어김없이 퇴근길 모퉁이를 돌아 나타나는 아버지를 보고 변두리 동네사람들은 지은아빠를 보고 시계를 맞춘다며 농을 쳐주곤 했다. 그러면 뿌듯한 기색으로 자신의 루틴을 더욱 확고히 했던 사람. 멀끔한 외모에 상냥하고 순진한 구석이 있는 남자는 가정적이란 수식이 제격이었다. 나는 한 번도 부모가 서로 얼굴을 붉히며 다툰 일을 본 적이 없었으며, 두 사람을 항상 히죽거리며 노는 다정한 친구 같기만 하다고 생각했다. 나에겐 부드러운 카스텔라처럼 달콤한 기억만을 만들어 주던 아버지.
자라면서 엄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전가하기엔 부당하다고 누구보다 아버지를 잘 아는 그의 딸로서 변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고,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갈라진 심정에 일말의 책임이 있어 보이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그녀의 딸로서 뒤틀리는 마음이 상충되어 혼란스러웠다. 내 마음이 외롭기 짝이 없다 생각한 것은 흔치 않은 이런 양가감정이 어디에 내놓기도, 이해받기도 어려운 일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둘도 없는 금슬 좋은 부부였다 치사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것이 순전히 설령 오해였다 해도 결국 남편의 외도라는 흔하고 뻔한 키워드 하나에 정이 박히듯 무너져 버린 가정이 되어 버린 형국이 사실이니.
하지만 장담컨대, 유무죄를 가리는 법정에도 서 보지 못하고 엄청난 죄를 받아버린 아버지는 애처로운 사람이었다. 시청 사거리에서 목격된, 아버지와 시시덕 거렸다는 당사자가 누구였는지 몰라도 아버지에게는 실체가 없는 존재였다. 그러니 그 자신으로서는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버지 입으로 말한 적은 없어도 아마 남겨진 어린 자식이 없었으면 그 또한 살 이유를 찾지 못하고 부러져 버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아버지는 십 년 넘게 밤잠을 제대로 못 이루며 가슴이 쬐이는 증상으로 괴로워했다. 말 그대로 마음의 병을 달고 산 것이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내가 품고 기억하는 의문 같은 것을 내보이고 아버지를 추궁할 순 없었다. 여차하면 아버지 마저 없어 질까 봐 무서웠던 게 사실이다.
잘잘못을 따지기에 모든 것이 늦어 버리고 남겨진 눈앞의 아버지가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내게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기침을 달고 사는 내가 어디서 진짜 큰 병을 옮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면이 컸는데, 모든 것에 완전무결을 꿈꿨던 엄마는 실상 이렇게 잡균 하나에도 무너지는 면역력 없는 마음의 온실을 가꾸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너무나 견고해 보이는 두 사람의 사이에 무균성은 사실 독이 되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다 아니다. 누구라도 한 점의 균열로 마음의 축이 산산조각 나 버리고 말 수 있지 않은가? 지치고 힘든 시기에 대못이 되어 박혔을 상황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또 그 심정이 생생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어찌 되었든 아버지는 후로 재혼을 하지 않았다. 내심 원래 있던 고모집으로 가길 원하셨던 할머니는 아이 키우며 홀아비가 된 아들 집에서 살림을 도맡아야 하는 환경이 버거웠는지 하루빨리 아버지가 재혼하길 바랐고, 이런저런 주선을 받아 왔지만 아버지는 아예 내키지 않아 했다.
살고자 직장을 다니고 정신을 분산시킬 취미를 찾는데 전력을 다하는 모습으로 그저 하루하루 세월을 이겨내고자 할 뿐이었다.
글 반디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