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_ Flight to Denmark 13. 그의 고백
과거의 거친 돌들이 세월이란 힘에 갈려 모래알처럼 곱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 버리게 되고 마는 것처럼, 불과 며칠 전의 내 생각을 아주 우습게 만들고 만 것은 시간이라는 장치였다.
기억의 대부분은 시간의 체에서 그저 미화되거나, 감량되거나, 하찮게 사라져 버리기도 하지 않나. 몇십 년이 흘러도 흐려지기보다는 뼈 마디에 새겨지듯 더욱 확연해지는 특수한 몇몇 기억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시간이 지난 뒤 생각해 보니 그의 이름도 모른 채, 관심을 가졌던 건 어쩌면 상호작용에 대한 끌림이었는지 모르겠다. 모든 것은 그가 내게 떨군 말 하나로 정리 되었는데 문제의 그 회식이 끝난 한 달 후 즈음이었다.
그동안 내 주변에 작은 변화들이 있었다면 쯔엉이 자기 반만 한 트렁크 세 개를 들고 우리 집으로 들어온 것과, 아버지의 동네 친구 같았던 우리 동 키 작은 경비 아저씨가 고령이란 이유 하나로 불현듯 쫓겨남으로써 이제 이 아파트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동년배였던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이 아파트에서 쓸쓸히 퇴장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사건은 이제 더 이상 그 사람은 내게 순두부집 사장이라는 긴 호칭으로 불리지 않으며 김형석 그 자체로 바뀌었다는 것인데, 그 배경에는 그의 고백이 주효했다.
어쩌면 그 고백은 섣부르게 내가 먼저였을 수도 있었지만, 좀 과장을 덧 붙이면 그동안의 마음을 숨기고 있었던 그 사람이 자기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내게 털어놓음으로써, 내 체면이 지켜진 것이다. 그가 그러지 않았다면 단속하자던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내가 먼저 쏟아 내 버릴 뻔하지 않았을까 해서 그 생각을 하면 간발의 차이로 그가 먼저였던 점이 다행이기만 하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던, 아니 정확히는 이제 사람의 감정을 신뢰하지 않던 내가 고백과 같은 말을 들었을 때, 이 사람을 만나도 되나 얼마간 고민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인생의 해답은 책상에 떡하니 놓인 단서처럼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니니, 결국엔 난 허기지면 밥을 먹는 본능처럼 그저 그렇게 자연스러워지자고 합리화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변한 걸까? 아니면 잃어버린 고유한 내 다른 조각을 찾은 것이기에 운명에 순응한 것뿐일까?
여기에 불안이라는 것이 침습하지 않은 순도 백 프로의 확신이 선 것은 아니지만 안정감을 주는 그 사람에게 왠지 자꾸만 힘을 얻고 있는 느낌이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가 심지어 아버지의 선물처럼 내게 주어진 사람이 아닌지 혼자 특별한 해석을 붙여 보기도 했다.
가게 휴일인 월요일, 우리만의 시간이 보장되는 이날 우리는 도서관 데이트도 하고 주말에 엄두도 못 내는 쇼핑몰을 찾아다니기도 하며 우리만의 시간을 즐겼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은 두 팔 걷어붙이고 함께 같이 가게 대청소를 벌이기도 했는데 가게 문을 닫고 청소 준비를 하면 그 사람은 듀크 조던의 ‘플라이트 투 덴마크’ 음반을 틀곤 했다.
잔잔하게 물 흐르듯 하는 이 피아노곡 연주는 어느 때나 어울려서 비가 오는 흐린 날 하찮은 작업을 하는 우리조차도 재즈 바에서 스포트 라이트를 받으며 바닥을 쓰는 연기자처럼 느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가 들려주는 듀크 조던의 뒷 이야기 때문이었을까. 연주자의 스토리를 알고 나서는 나는 더욱 이 음반에 매혹되었다.
3번 트랙 곡의 제목처럼 Everything Happens to me. _우리에겐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사랑을 믿지 않았던 사람에게 뒤늦은 인연이 찾아오기도, 희망을 놓았던 사람에게 행운의 여신이 날개를 펴고 내려앉을 수도, 평온 한 날들에 천둥 벼락이 내리 꽂힐 수도, 우리에게 준비된 인생이 없듯 어떤 예견도 불가한 것이 삶의 한 자락이 아닐까?
작업을 하는 우리 옆으로 튜크 조던이 몰던 노란 뉴욕의 택시가 들어오고 내일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힘을 내보라고 따뜻한 말을 전하고는 사라지는 상상을 해 보았다. 최상의 재즈 뮤지션에서 이혼을 하고, 사기를 당하고, 모든 것을 잃고 운전대를 잡은 그가 하는 말이 아니라 덴마크로 날아가 재기에 성공하고 이 곡을 리코딩 한 다음 상징과도 같은 그의 택시를 몰고서 가게 안으로 들어와 우리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것이다.
김형석에게, 이지은에게, 테무르에게, 무비나에게, 그리고 쯔엉에게도.
글 반디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