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보상을 해줄 텐가
15킬로, 나도 달릴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최고기록은 10킬로가 전부인데. 벌써 한 달 전이니 그 간의 경험치가 더 쌓여서 괜찮지 않을까?
그냥 5킬로 7킬로 달리던 거리를 한 세트 더 달리는 거겠지? 열정만으로 전날 저녁부터 머릿속에서 갈팡질팡 간을 보고 있었다. 걷지만 말고 내 페이스 대로 뛰어서 완주를 목표로 해보자는 마음이 커진다.
황금 같은 휴가인데 특별히 할 건 없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시간은 많고 컨디션도 나쁘지 않다.
날씨도 1도 (체감온도는 -5도)로 좋다. 다소 즉흥적으로 실행에 옮긴다.
할 수 있을 거 같은 마음 절반, 중도에 포기할 거 같은 마음이 딱 절반인데. 할 수 있다는 의지가 힘을 보태니 해낼 수 있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옷을 차려입고 충분히 몸을 풀어주고 런데이 앱을 켰다.
"가상 마라톤 15K" 도전!! 두근두근
예상페이스를 적으라네. 평소에는 6:40 가 편안한데 약간의 마진을 둬서 7분으로 설정한다.
15킬로라니 인생 최대의 도전이다. 한 달 전 10킬로를 뛰어넘는 기록의 갱신이다.
초반에는 워밍업으로 공원 도착까지 조금 걸었더니 페이스가 뒤쳐졌단다.
런데이 성우가 "설마 뒤로 걷는 거 아니시죠? 함께 달리는 러너들을 무시하지 말아 주세요" 한다.

헐. 제가요... 무시라뇨. 그럴 리가요.
10킬로 까지는 견딜만했다. 11킬로가 넘어가니 시간이 너무 안 가면서 기세가 확 꺾인다.
1킬로 지날 때마다 런데이가 몇 킬로 뛰었고, 평균 페이스는 얼마라고 알려준다.
빨리 성우가 달린 킬로수를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자꾸 딴소리만 한다.
음악은 아까부터 귀에 안 들어오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으려나 그것에만 집중한다.
자꾸 시계를 보게 된다. 몇 분 지났나.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았나.
페이스가 자꾸 떨어지는 건 아닌가 계속 체크하게 된다. 페이스가 떨어진다는 건 이 고통의 시간이 더 길어진다는 의미다. 거리는 정해져 있는데, 느리게 달리니 골인지점까지 고통의 시간이 지연되는 거다.
생각을 다른 쪽으로 바꿔보려고 애국가를 불러본다. 애국가가 제일 길고 그나마 가사를 외우는 게 그거라.
3절, 4절도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2절이 왜 기억이 안 날까. 절대 기억이 안 나네. 2절을 기억하느라 꽤 오랜 시간을 쓴 거 같은데... 얼마 안 지났다. 남은 킬로수에 변화가 없다.
아~ 왜 이 고생을 한다고 했을까.
10킬로를 넘어서니 한 걸음 한 걸음이 고비다. 평온한 내 페이스를 계속한다는 게 쉽지 않구나.
하긴 그럼 하프코스, 풀코스를 왜 다들 힘들어하겠어. 난 고작 10킬로 달렸을 뿐인데 인생 최대 위기를 맞은 기분이다.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완주 못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요즘 지름신이 자꾸 옆구리를 찌른다. 절반 이상은 지름신에 넘어가 있는 상태긴 하다.
러닝 관련 영상을 자꾸 보다 보니 사람들이 '가민' '가민' 하는 거다. 도대체 가민이 뭔가 검색해 보니 러닝에 특화된 워치였다. 한번 충전하면 11일 동안 안 해도 된단다. gps 상태로는 19시간 유지된다고도 한다. 와~ 최고다. 러닝에 필요한 여러 기능과 다양한 훈련을 제공하고 부가적으로 내 몸 상태도 관리해 준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면 굿모닝 인사와 함께 내 몸 상태를 알려준다. 수면의 질과 전날의 운동량, 심박수 등을 복합적으로 분석해서 리포트를 해준다고 한다.
"오늘은 좀 쉬셔야겠어요"
"오늘은 5km 정도 달려볼까요?"
나를 잘 아는 작은 디지털워치가 운동 비서 겸 트레이너 역할을 해주는가 보다.
손목에 하나씩 가민을 차고 달리는 러너들이 부러웠다. 나도 사고 싶다는 지름신이 며칠 전부터 떠나질 않는다.
11킬로 이상 달리고 있을 때 내 마음 상태
-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고생을 사서 하는지. 그냥 편하게 매일 5킬로만 달려!
- 올림픽에 나갈 거도 아니고 프로로 활동할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무리하지?
- 가민은 무슨, 다 필요 없고 그냥 워치로 설렁설렁 기본 운동만 하자
- 목표한 러닝을 끝까지 완주한다고 자신감이 생기는 게 아니라, 완주한 사람은 그만큼 끈기와 지구력이 DNA에 있는 사람이야. 러닝 아니라 뭘 해도 그 사람은 끝까지 해낼 사람이야. 러닝은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이 가져다 부친 거야. 훈련의 도구 일 수는 있지만 원래 해낼 수 있는 사람인거지.
- 러닝이 자신감을 길러주는 게 아니라, 자신감을 원래 갖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모르고 있었던 거지.
- 12킬로만 달릴걸. 10킬로 - 12킬로 - 15킬로 점진적으로 늘렸어야지 한꺼번에 확 늘리니까 넘 힘들잖아. 몇 시간 전에 의사결정 잘못한 나를 원망한다.
- 10킬로 넘어가면 다른 러너들 에너지젤 그런 거 먹던데, 물도 준비해야겠는걸. 목말라 죽을 거 같아. 몸속에 수분이 부족해서 그냥 픽 쓰러지는 거 아니겠지.
운동 완주 후의 내 마음 상태
- 15킬로를 해내다니 대단하다. 멋지다.
- 오늘 아주 큰 성과를 냈으니, 저녁에 막걸리나 한잔 할까. 보상이 너무 소박한 거 아닌가.
- 내일은 쉬는 타임으로 1~3킬로만 가볍게 달리고, 토요일에 7킬로 2월 미션 달리기 하고.
- 샤워하기 전에 세수를 항상 먼저 하는데, 얼굴에 가루 같은 게 묻어난다. 비누로 닦고 나면 피부에 노폐물이 빠져나와 개운하다. 아직은 빨갛게 익어서 우유빛깔은 아니지만 조금 지나면 깨끗한 느낌이 든다. 피부가 탄력 있고 더 좋아진 느낌이 좋다. 여름엔 자외선과의 싸움이겠지?
- 밥 맛이 더 좋고 뭐든 살찐다고 가려 먹었는데 이제 다 먹어도 될 거 같은 느낌.
- 배에 11자가 생긴 거 같은데, 아닌가? 팩트 체크는 안되었지만 그런 착각을 하고 있는 내가 좋다.
- 그래도 15킬로는 좀 무리였어. 12킬로였으면 더 좋았을 거야.
- 가민은 그래도 사고 싶은가? 가민 사면 고통의 강도가 계속될 거 같은데.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오히려 15킬로를 뛰고서 지름신에 대해 한 발자국 멀찍이 떨어져 보게 되었다.
p.s: 15킬로 뛴 2/20일엔 구매욕구가 시들했다. 이 글을 쓰는 2/24일, 내 손목엔 가민이 채워져 있다. 하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