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사강의 책은 호불호가 갈린다. 주위에 물어보면 "어떻게 사강을 싫어할 수가 있죠?" 파와 "사강의 문학은 별로다."로 극명하게 나뉜다. 보통 책을 읽으면 내용이 어렵다고 말할 텐데. 평가가 엇갈리고 선호가 분명한 작가는 묘하게 끌림을 준다. 그중 가볍게 읽으려고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집었다. (각잡고 한나절이면 충분히 읽을 양이지만, 섬세한 감정선을 느끼려면 시간이 더 걸릴듯 하다.) 연애 권태기라면 혹은 이별을 앞둔 상황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끝까지 읽을 자신이 없을 거 같다. 서로의 바람을 존중해 주는 4각 관계는 연애의 자유를 표방하는 프랑스의 고유한 사랑방식일까?
당장 한국 정서, 정확히는 나의 정서와는 다른 접근으로 연애를 풀어간다. 한마디로 바람과 연애 사이랄까? 서로의 바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관계를 이어나간다. 남주인공 로제는 권태기에 빠진 남친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마음에 안 드는 건 왜 남자는 먼저 바람을 피우는 나쁜 놈으로 묘사해서 여주인공의 변심을 정당화하는 이야기를 짰냐는 거다. 후에 어떤 의미에서 남주인공 폴을 이렇게 이상한 사람으로 표현했는지 스토리 구성상 납득은 했건만. 소설에 과몰입 금지라고 당당히 외쳐도 인물에게 빡치는 거보다 작가의 서술 방향에 화를 내는 거라고 정신승리해 본다. 이런 열린 연애를 표방하는 소설의 서사에는 선과악, 시작점이 분명할수록 읽는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덜어주니깐 말이다.
여주인공인 폴에게 시몽이라는 젊은 청년이 주는 신선함은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더해준다. 그는 지극히 저돌적인 듯하면서도 20대 청년으로서 서투르다. 39세의 여주인공에게 어떤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 순수한 사랑을 믿는 그에게 폴은 어떤 의미였을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고 쓴 그의 어색한 작업 멘트에 폴이 감동을 느낀 건 무미건조한 남친과의 관계에서 신선한 자극이었을거다. '나'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게, 열렬한 구애를 받는다는 게 얼마나 짜릿한 감정인가?
시몽이 젊지만 생명력이 담은 말과 행동들은 어린 시절 서투른 연애를 떠올리게 한다. 폴도 아마 그런 시절을 떠올리고 싶어서 시몽을 받아들였을거다. 추억은 미화되지만 그 기억은 사람을 살게 한다. 이전에 포켓몬빵 런 같은 상황을 보면 사람들에게 과거의 그 시절, 그 감성이 열정으로 바뀌어 이슈가 되는 걸 보면 좋은 기억만 간직하고픈 게 사람인가 보다. 사강은 단순히 음악회를 간다. 무엇무엇을 한다로 풀어내지 않았다. 같이 무엇을 한다. 시간을 같이 보낸다는 건 사랑을 내어준다고 믿는다. 폴에게 그의 열렬하고도 순수한 마음에 어느새 철벽치던 빗장을 살며시 열었다.
나이와 계급, 상황, 현실을 뛰어넘는 사랑은 언제나 감동을 준다. 로미오와 줄리엣, 파리의 연인, 그리고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엔돌핀이 뿜뿜하고 행복감이 충만한 기분 좋은 흐름에 나도 덩달아 들뜬다. 흔하고 밋밋한 연애는 관심 없다. 그런 빡빡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소설책을 읽는 게 아니니깐 말이다.
하지만 이내 이 책은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헤어졌던 연인을 다시 추억하고, 뜨거운 연애는 불안한 미래와 교환되고 있다. 여주인공은 자신이 늙어간다는 사실에 젊은 20대 청년과는 맞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헤어지고 각자 행복하기만 할 줄 알았건만 폴과 로제는 다시 마주치니 잊었던 스파크가 확 튄다. 이게 무슨 막장 드라마야... 라고 어린 시절에 나라면 이해 못 할 전개다.
사강은 인물이 지닌 마음의 변화를 잘 표현해서 폴의 마음과 전남친 로제의 내면을 잘 조명한다. 그 와중 현 남친인 20대 청년 시몽의 감정은 로제에게 점점 비워낸 술병처럼 흩뿌려지고 공허하다. 사람을 이어주는 건 처음에는 강렬한 불꽃이지만 그 관계를 유지하는 건 또 다른 문제라는 걸 사강은 말하고 싶었던 걸까? 폴은 전남친 로제와 다시 결합했지만 기분이 찝찝하지 않은 건 나도 그와 그녀의 선택에 납득했기 때문이다. 뜨거운 사랑은 자극적이지만 계속될지 보장하지 못한다. 무미건조한 현실에서 msg가 듬뿍 담긴 인스턴트는 맛있다. 계속 먹으면 몸만이 아니라 끝내 마음까지 다친다.
전 남친이 현남친이 되는 극적인 순간에도 그녀는 남친의 새로운 바람을 알면서도 또 이해해준다. 질긴 인연에는 학습효과가 없다. 고통을 감수해도 익숙한 관계 그리고 안정감이 계속 되길 원하는 터라 전 남친이었던 남자를 그저 따른다. 시몽에게 펼친 주도권을 버리고 찾은 안정감이다. 시작을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는 역시 헤어질 때도 머리로 따라가기 어렵게 끝을 맺는다.
막은 내렸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시몽이 한 행동들이 타투처럼 내 안에 새겨졌다. 젊은 그는 낯선 이별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간다. 인연을 잃은 고통에 젊은 열정을 애절하게 포효하지만 이젠 폴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는다. 그녀에게 그는 이제 떡밥이 식은 콘텐츠였기에...
서로가 사랑을 하더라도 각자가 보내는 시간의 밀도는 너무나도 다르다. 그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기에 폴은 그를 '쿨'하게 보내주려고 노력했다. (짐을 싸면서 눈을 못 마추친 건 그녀가 죄책감을 느껴서라기보다는 불편한 상황을 빠르게 벗어나고픈 무의식 행위에서 나온 거라고 본다.) 사랑이 전부였던 시몽. 친구라면 그에게 한마디 건네주고 싶다. "시몽 넌 실패했어. 그치만 넌 옳았다."
한줄평 : “어른들의 사랑법, 뜨거운 사랑 후 그다음을 고민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