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두려움에 맞서기
무슨 글을 써야 할까.
어느새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보다 침대,
TV 앞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호흡이 긴 글에 두려움이 생겨,
밀물처럼 밀려와
물이 방 안까지 스며들기 시작했다.
밀물과 썰물의 조화가 어우러진
바다 풍경은 한없이 아름답지만
끝없이 밀물만 지속되면,
언제 덮칠지 모르는 두려움으로 변질되고 말 터.
썰물 없는 밀물.
지금 이 두려움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방 안에 물이 가득 차 질식하기 직전, 노트북 전원을 켰다.
다행히 물은 잠잠해져
원래 있어야 할 바다로 쓸려 내려갔다.
다양한 류의 두려움을 느꼈다.
수평적 두려움과, 수직적 두려움을 느꼈고
망망대해 선 아득한 두려움을 느꼈고
흔히 고소공포증이라 불리는,
높은 곳에서의 아찔한 두려움도 느껴보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중 가장 극단적이라 할 수 있는 두려움은, 바로
'앞이 보이지 않는 두려움'인 듯싶다.
청각 장애인의 삶을 생각했다.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팔과 다리가 없는 닉 부이치치의 삶도 생각했다. 살 수 있을 것 같다.
후각 장애도 생각해보았다.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각장애라면.
보이지 않는 대가로 1분마다 1억을 현금으로 지급한다 해도
절대, 결코 살 수 없을 것 같다.
그만큼 '보이지 않는 두려움'은 어마어마하다.
썰물 없는 밀물. 파도와 태풍.
시야마저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절망과 좌절, 무기력이라는 단어로도
부족할, 몹시.
나에겐
세상을 볼 두 눈이 있다.
시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안경이라는 도구의 도움을 받아
렌즈 너머 세상을 똑똑하게,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 좀전처럼
인간의 힘으로 어찌 못할 불가항의 재해를
발 끝까지, 온몸으로 느낄 때가 있다.
코로나까지 겹친 막막한 현실에서
내면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기에.
눈 앞 초록 이파리들이 싱그럽고,
꽃이 아름다우며 햇살이 찬란하고
눈부신 자연의 잔치가 매일 있어도
두 눈 멀쩡하지만 내면의 눈이 멀어
모든 것이 들리고 만져지고 느껴지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두려움보다 중요한 것, 두려움에 대한 반응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두려움을 얘기하고, 마무리짓는다면
이 글 읽는 모두가 사로잡혀, 두려움의 파도에 휩쓸려
상어의 거대한 이빨에 질식할까 줄행랑 칠지 모르지만.
인간은 두려움에 벌벌 떠는 존재로 지음 받지 않았다.
세상 만물 중 가장 고귀한 피조물로
고차원적 사고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도록 설계되었다.
우리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성경에 나오는 다윗이
물맷돌로 골리앗을 죽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골리앗의 가장 약한 부분, 약점을 알기에 성공했고,
이는 바로 '골리앗의 이마'였다.
골리앗의 다른 부위는
다윗의 힘으로 감당 못할 두려움이었겠지만
이마만큼은 다윗에게,
길가를 지나는 개미 다리만도 못한 것이었다.
내면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혼돈에서,
골리앗의 이마를 찾고 발견해야 한다.
그다음은,
작지만 한 번에 승부를 볼 무기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기다려야 한다. 이 지점이 가장 중요하다.
가장 확실한 때를 기다리며,
무기를 갈고 있으면 분명 때는 온다.
대부분 여기서 포기한다.
"그래,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라며
설계와 도면과 연장과 모든 것을 팽개치고
적에게 얼굴 대신 등을 돌려 패배를 택하지만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으며 기다리면
결정적인 순간, 결정적 기회
골리앗의 이마에 돌을 던져 넘어뜨릴
최후 승리의 날이, 반드시 온다.
오랜만에 쓰는 글이라
짝짝이 양말처럼 무턱대고 끼워 맞추고 제자리를 찾느라 어수선했지만
이 글을 통해 전하고자 한 진심이 읽혔으면 하는 바램이다.
코로나를 떠나
극단적 개인주의로 치닫는 사회
고독하고, 외로운 시기를 겪고 있을 모두에게
절대 심심하지 않은 위로를 건네며
마침내 골리앗의 이마를 맞춰 쓰러뜨릴 그날
다 함께 축배를 들기를, 전심으로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