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달라하라의 나쵸

"걱정 마세요, 저 게이예요."

by 세라

수상한 동거의 시작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의 일이었다. 과달라하라가 목적지는 아니었는데, 공항이 있는 도시여서 경유하는 김에 며칠 묵기로 했다. 예약한 호스텔에 도착했을 때였다. 가격에 비해 황당할 만큼 좋은, 과장하자면 호텔급의 호스텔이었다. 가난한 여행자로서 항상 최저가의 도미토리에 묵곤 했는데, 이게 웬 횡재? 그러나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안내받은 호실의 방문을 열자, 아늑한 2인용 스위트룸에서 왠 건장한 남자가 스웩 넘치는 몸짓으로 나를 맞이해 주었던 것이다.


남자: 안녕하세요!

나: 안녕하세요? 그런데 여기가 도미토리 맞나요?

남자: 네, 저도 이런 곳은 처음이에요.

(멍……)


남자는 재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남자: 아, 걱정 마세요, 저 게이예요.

나: 농담이죠?

남자: 진짜예요.


'도미토리' 안에는 화장실도 따로 있었고, 넓은 침대도 2개, 개인용 스탠드, 개인용 서랍, 옷장, 선풍기, TV 등 완벽히 분리되어 있긴 했다. 그는 나보다 하루 먼저 와서 파악한 각종 물건 위치와 기계 사용법을 설명해 주더니, 산책을 하러 간다며 휙 나갔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방을 훑어보았다.


……아니! 그래도!


외국에 남녀 혼숙 도미토리가 많다는 것까진 알고 있었는데 '2인실 도미토리'라니! 이게 말이 되나? 혹시 헷갈린 게 아닌가 해서 프런트에 가서 재차 물었지만 그게 정말 도미토리였고, 옮길 방도 없다고 했다. 나는 충격을 받은 채 스위트룸으로 돌아갔다. 게이 남자가 산책을 나간 사이에 짐을 정리하고 샤워를 했다. 그리하여 낯선 남자와의 수상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나는 과달라하라에 3일 동안 있었고, 그는 내가 오기 전날 밤부터 4일을 묵어서, 결론적으로 과달라하라를 여행하는 내내 그와 같은 방에서 묵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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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쵸 곤잘레스


중남미나 스페인 문화를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나쵸'가 그쪽 동네의 전형적인 이름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때의 나는 몰랐다.


나: 이름이 뭐예요?

남자: 나쵸예요.


아이 엠 나쵸, 자기 이름이 나쵸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멕시코에서 나쵸를 만나다니, 한국인 이름이 김밥이라는 거야 뭐야. 그러나 그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다시 충격을 받았다. 농담이 아니었다. 유쾌한 아르헨티나 가이, 그의 이름은 정말로 나쵸 곤잘레스였다. 우리는 나중에 페이스북 계정을 교환했는데 거기에는 정말로 Nacho Gonzales라고 쓰여 있었다. (진짜라니까!)


그는 아르헨티나 사람이지만 멕시코에 살고 있었고, 과달라하라에는 휴가차 놀러 왔다고 했다. 그는 스페인어도, 영어도 완벽해서 내 엉망진창인 '스팽글리쉬'로도 막힘 없이 대화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각자 돌아다니며 하루동안 찍은 사진을 서로 보여주기도 했고, 좋아하는 위스키나 와인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밤이 되면 각자의 침대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각자 노트북과 태블릿으로 작업했고, 그러다가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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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식 스페인어


여행 정보를 얻기 위해 프런트 데스크로 갔다. 그런데 거기에 나쵸가 합류하면서, 갑자기 멕시코 사람과 아르헨티나 사람과 한국 사람 셋이서 수다판을 벌이게 되었다. 주제는 스페인어였다. 전날 밤에 나쵸가 내 스페인어 공부 노트를 봤기 때문이었다.


그들에 의하면, 같은 스페인어라도 멕시코는 부드럽고 상냥하고, 아르헨티나는 거칠고 투박하다고 한다. 특히 아르헨티나식 스페인어는 문법도 복잡하고 개성도 강하다고. 그들은 나를 앞에 두고 번갈아가면서 '네이티브 억양'을 들려주었다. 나는 여행 정보를 얻으러 갔다는 것도 잊고, 한참 동안 각국 대표의 열정적인 연기를 직관했다.


특히 아르헨티나 특유의 손동작이 기억에 남는다. 무언가를 강조할 때, 따질 때 등등 거의 모든 상황에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제스처라 하였다. 그날, 나쵸 덕분에 나도 완벽하게 습득했다. 이것만 할 줄 알면, 스페인어 그거 대충 얼버무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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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쵸의 세 가지 취미


나쵸는 호감을 주는 밝은 인상에 친화력도 무척 좋았는데, 그 때문에 그가 있는 자리는 항상 화기애애했다. 어떤 날에는 밖에서 한바탕 꺄르르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나쵸가 방으로 들어오면서, 쟤들은 내가 게이인걸 모른다며 "하- 하- 하-" 크게 웃어제끼기도 했다. (정말 그렇게 웃었다!) 사실 나쵸는 약간 아줌마(?) 같았다.


며칠 밀착생활(?)하며 알게 된 바, 나쵸의 취미 중 하나는 요리였다. 나는 과달라하라에 머무르는 동안 현지 마트에서 재료를 사 와서 간단한 요리를 해 먹었는데, 그때마다 주방에서 나쵸를 자주 만났다. 나쵸는 옆에서 약간 모자라던 스파게티면을 빌려주기도 하고 불쑥불쑥 참견하기도 했다. 내가 주방에 서서 스파게티를 후루룩 먹고 있으면 나쵸가 또 "하- 하- 하-" 하고 웃으면서 "너 지금 되게 배고프구나!" 하고 후루룩 지나갔다.


또 하나 쓸데없이 알게 된 것으로, 나쵸는 한 번 나갔다 오면 웬 조리 도구들을 잔뜩 사 왔다. 엄청 무거워 보였는데 여행 가방의 무게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희한한 물건들을 사들이고 있었다. 절구 같기도 하고, 토기 같기도 한 특이한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며, 나쵸는 신이 나서 내게 설명했다. 나쵸, 여기 살림살이 차릴 거야?


나쵸의 세 번째 취미는 옷 쇼핑이었다. 나쵸가 코트 같은 것들(?)을 사 온 날, 나도 나쵸의 새 옷을 걸쳐 보며 거울 앞에서 패션쇼(?)를 하고 놀았다. 나쵸는 "이걸 얼마에 샀냐며언~" 하고 뿌듯한 표정으로 성공담을 떠들었다. 나쵸의 옷은 나에게 너무 커서 우스꽝스럽긴 했지만,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너무 잘 샀다고, 짱이라고, 아낌없이 칭찬을 해 주었다. 훈훈한 장면이었다. 나쵸는 옷이 많이 마음에 들었는지 다음날에도 거울 앞에서 혼자 요리조리 핏을 보고 있다가 나에게 들켜서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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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친구


"하- 하- 하-",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제스처가 떠오른다. 외국에서 사람을 만날 때 좋은 점은 첫 만남에 나이로 상하를 결정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이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와 내가 적어도 15살 이상 차이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한국이었다면, 한국 사람이었다면, 이런 관계가 가능했을까? 충격과 의심으로 시작했지만 즐겁고 특별한 3일이었다.


나쵸는 헤어질 때 수면안대도 선물해 주고 캐리어도 들어주며 도와주었다. 그는 언젠가 아르헨티나에 놀러 오라고 했다. 자기한테는 언제든지 결정되면 날짜만 말해주면 된다고, 아주 쿨하게.


유쾌하고 재미있는 나쵸 아재, 다음에 진짜 아르헨티나에 놀러 갈게.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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