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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Oct 11. 2023

인사부에서 연락이 왔다

퇴사일기#03

 귀하는 2023.OO.OO일부로 당사와의 근로 계약이 종료됩니다.


 인사부에서 연락이 왔다. 제목은 <계약 종료 안내 통지서>. 메일에는 처리 절차에 대한 안내와 앞날에 건승을 빈다는 내용이 건조하게 적혀 있었다. 별의별 회사에 다녀 봤지만, 이번 회사의 퇴직 절차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복잡했다. 사직서 기안은 물론 전산장비 반납과 명의 변경, 인수인계서 제출, 사원증 반납, 법인카드 해지, 퇴직 면담, 보안 점검 등 그 외에도 15개가 넘는 서류를 각각 해당 부서에 가서 사인을 받아서 제출하라고 한다. 모니터 앞에서 한동안 얼이 빠져 앉아 있으니 동료들이 내 계약 종료 통지서를 구경하러 왔다. 내가 겪고 있는 이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일종의 스포일러였다. 얘들아, 먼저 맞는 매, 제일 아프다?


 지금 내 갈 길 찾기도 바쁜데 웬 문서 노동이란 말이냐. 나는 아무도 들리지 않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복잡한 절차를 처리하고 있노라니 슬픔보다는 분노가 더 커지는 오늘, 일단 간단한 것만 먼저 해 놓고 짬짬이 채용 공고를 서치하고 새 입사지원서를 작성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회사를 저주하면서……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내 한 몸 먹여 살리는 방법이, 정말 이것밖에는 없는 걸까?


 전공을 살려 한 가지 일을 10년 넘게 했는데도 내 집 마련은커녕 만년 쪽방 자취생에 전세 사기를 당하고 구조 조정을 당하고 금리는 2배로 오르고 길거리에 나 앉게 생겼다. 이게 정상일까? 이게 다 내 무능력 때문일까? 쓰고 버리는 수많은 회사, 갑질, 배신, 열정 페이, 남녀혼숙 고시원, 쉰밥을 내놓는 하숙집, 음습한 창고방, 끔찍한 층간 소음…… 사는 게 아사리판이자 시시포스의 형벌인데 연애는 무슨, 결혼은 무슨. 그뿐인가, 세월호, 이태원 참사, 이상 기후, 코로나 바이러스, 전쟁, 칼부림, 물가 폭등 등 온통 우울한 일투성이다. 나는 왜 아직도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는가? 우리 세대는 부모보다 더 가난한 세대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내 부모님은 가난했고, 졸업한 지 10년이 넘게 지났지만 학자금 대출은 아직도 상환 중이다. 프린트비가 모자라서 제시간에 리포트를 제출하지 못한 대학 시절, 도대체 그때보다 나아진 게 뭔가? 한때는 나도 자격증과 어학 점수, 봉사활동, 교육과정 수료증을 모으다시피 했다. 20대 내내 알바의 여왕이라 불리었고 30대까지도 쓰리잡을 뛰었다. 청년 혜택은 내 법적 청년의 조건이 끝나갈 즈음 부랴부랴 모색되기 시작했고, 나는 이제 청년인지 뭔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그 끝에는 실업뿐이고 까마득한 절벽뿐이고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면……. 처절한 몸부림 끝에 드디어 세상의 끝에 도달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길은 계속 이어지고 있고, 그 길은 더 큰 절망과 고독으로 향하는 길인데 거기 말고는 길이 없고, 뒤에서는 산짐승들이 쫓아오고 있다면……. 


 어느 곳이라도 좋다! 어느 곳이라도! 그것이 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


 보들레르는 삶을 '병원'이라고 표현했다. 이 세상 자체가 한 채의 병원이라서 창가 앞으로 가 봐도, 침대의 위치를 바꾸려 해 봐도, 결국 우리가 있는 곳은 병실이고 우리는 환자라는 것. 아아, 여기, 또 한 명의 인생 불구자가 절규한다! 이 세상 밖이라 믿었던 퇴사 이후 역시, 그저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옮기는 것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애쓰고 있는 모든 일이 사실은 이 거대한 병원을 끝없이 증축시키고 있는 일에 불과하다면?


 오늘은 폭탄 금리가 적용된 전세 대출 이자가 빠져나가는 날이기도 했다. 통장에 폭격을 맞고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 아아, 나는 왜 아직도 미쳐버리지 않았는가? 이렇게 하등 멀쩡한 정신으로 글을 쓰고, 이 회사 다음에는 또 다른 회사가 있다는 절망 고문에 다시 한번 고개를 푹 숙이고 입사지원서에 서명을 했다. 마치 병실을 연장하듯, 삶을 연장하면서! 지금 나에겐 정말 극소량의 제정신만 남아있다. 고작 이걸로 남은 삶을 어떻게 버티란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제발 방법을 알려 달라. 수면제라도 달라, 마취제라도 달라, 삶이여……. 


 예전에는 일이 더 간단했고 필요할 때마다 광고를 내면 그만이었다. "젊은이가 일거리를 찾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렇게 광고를 내야 할 판이다. "아쉽게도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니고 젊기는커녕 늙수레하고 이런저런 풍파에 시달린 남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잠자리를 제공해 주실 분을 찾습니다.


 스위스 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문장이다. 멀지 않은 내 미래의 모습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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