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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Oct 11. 2023

마녀가 되었다

퇴사일기#05

 해야 할 일은 다 했다. 새로운 일은 받지 않기로 했고, 자잘한 상시 업무만 처리하면 된다. 나는 사무실에 꾸역꾸역 앉아서 남은 복지포인트를 어떻게 다 쓰고 나갈지 따위의 고민이나 했다. 집에 쌀이 얼마나 남았더라, 퇴사 전에 뭘 비축해 둬야 좋을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일을 시키던 회사도 있었는데, 이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새벽 5시에 일어나 가장 일찍 출근해서 불을 켜는 일은 그만두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는 일 따위로는 아무것도 인정받을 수 없는 세계에서, 나는 무엇을 위해 불을 밝혔나. 이제 남은 동료들도 자기네들 중 과연 누가 살아남을까를 공공연히 재고 있다. 이 암투에서 일찌감치 열외된 것에 안도해야 하나. 사무실에 한가롭게 앉아 있는 것만으로, 내 존재는 분위기를 흐리는 마녀가 되었다. 다른 이들도 의욕을 잃는다나. 이것마저 내 탓인가. 시대를 막론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은 마녀가 된다. 부릴 수 있는 마술이 있건, 없건. 몇몇 사람들은 마녀를 피하거나 모른 척한다. 그네들이 무능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무정하기까지 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퇴근길, 평소처럼 헤드폰을 끼고 한강을 지나친다. 버스, 버스, 지하철…… 하루 2시간씩 대중교통에서 졸거나 치이는 일에서 이제 곧 벗어날 수 있겠구나. 문득 지하철 천장을 바라보니 깊은 한숨이 터져 나온다.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핸드폰을 보고 있다. 나는 저들 중 누군가와 SNS에서 만났을까? 참을 수 없는 나의 슬픔을 온라인상에 칠칠맞게 털어놓으면 저들 중 누군가는 읽어줄까? 갖고 싶다, 그런 능력.


 집으로 와서 노트북을 켠다. 나는 빈 스크린 앞에 앉아서 무조건적인 동의와 위로를 갈구한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마녀가 아니라서 어떤 마술도 부리지 못한다. 무능과 무정이 여기까지 이어진다. 슬프다, 라는 단어를 나도 모르게 툭 쓴다. 아, 이 슬픔은 한 번도 슬픔, 이라고 발음되지 못했구나……. 순간 활자들이 살아 움직이며 내게 말을 건다. 거기 구겨진 너, 너는 슬픔이구나. 뒤돌아 서 있는 너, 너는 부끄러움이구나. 둥글고 작은 어깨를 가진 너는…… 외로움이구나. 그러나 다른 것들은? 너무 식고 굳은 것들은 이제 몸인지 마음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다.


  밤이 되니 어쩔 수 없이 한층 처연한 슬픔이 잦아드는데, 그럴수록 씩씩하게 밥을 먹기로 한다. 오늘 저녁은 3분 카레다. 1분에 잘 먹자, 2분에 먹어야 산다, 3분에 다 먹고살려고 하는 일이다…… 카레 완성.


 카레에 범벅된 노란 영혼이여, 몰랐던가. 이 도시에 마술은 없다. 카레나 먹자. 누가 널 피하든, 모른 척 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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