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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Oct 11. 2023

오늘 밤도 스탠바이 큐

퇴사일기#09

 지금 내 글쓰기는 내 삶의 현재진행형이다. 내 생각과 감정의 라이브 방송이다.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시작되는 데일리 방송 프로그램처럼 퇴근 후 글쓰기를 스탠바이 큐 한다. 이건 매일 하던 일이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팀에서 열외된 나는 이제 야근도 없고 업무 부담도 없어서, 어둠의 장막 뒤에서 글쓰기로써 나만의 방송을 이어가고 있다.


 퇴근 후 나는 의자에 앉아 내 화이트 스크린을 방문할 순도 높은 문장을 기다린다. 오직 한 남자만을 기다리며 집착적인 글을 쓴 아니 에르노처럼, 나는 문장에 대한 단순한 열정으로 절망이 잦아드는 순간들을 버티고 있다. 특별한 문장이 오지 않아도 하루의 일과를 쓰고 쓴다. 하루를 되짚는 방식으로 하루를 흘려보낸다.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큐. 


 삶은 기어코 미완의 글을 세상에 꺼내놓게 만들었다. 몸통이 잘린 문장들은 상처 입은 나를 숨 쉬게 한다. 문장도 삶도 고통의 현재진행형이다. 상처 입은 것들만이 서로를 숨 쉬게 한다.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도 나는 쓴다. 쉴 새 없이 울음을 받아 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생각이 개입하기 이전, 내 몸의 상태다. 위장을 뒤틀고, 심장을 지피고, 바닥을 할퀴는 '실감' 속에서 글이 실시간으로 태어난다. 오랫동안 글쓰기는 '마음의 활자화'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토록 감각적이고 실물적인 것이라면 몸에 더 가깝다고 해야겠다. 다만 이만한 삶의 고통에도 내 글이 아주 멀리까지 가지는 못한다는 사실이 씁쓸할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나도 "지나고 나면 괜찮다"라는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미래의 나여, 혹시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되는 문장을 쓰려고 했는가? '지금'의 왕이자 권위자로서 경고하겠다. 지나기 전에는 안 괜찮다. 지나고 나야 괜찮다. 지났으니까 괜찮은 거다. 나는 내가 쓰는 이 글이 어디까지 갈지 나는 모른다. 소설이나 시나리오처럼 대략적인 얼개를 가지고 살을 붙여가는 글이 아니다. 나는 활자가 가자고 하는 곳으로 갈 뿐이다. 그러니 이 글이 어디로 갈지는, 글 쓰는 나보다는 키보드가, 키보드에 흩어진 자음과 모음이,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라이브 방송에 완벽함은 없다. 결론 없이 나아가는 것이 라이브 방송의 묘미다. 라이브 방송을 하는 사람들은 늘 이렇게 거칠고 자기중심적인 면이 있다. 나도 궁금하다. 이 라이브가 결국 한 인간이 얼마나 구차하게 무너지는지를 증명하는 다큐멘터리가 될지, 그저 지루한 모놀로그를 늘어놓다가 흐지부지 끝나버릴지. 거기, 내 글을 보고 있을지도 모를 시청자들이여, 사과하겠다. 나도 적이 우아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난들 더러움에 물들고 싶었으랴. 그러나 지금은 그저 나의 이기적인 절망이 누구에 의해서도 수정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라이브 형식은 이에 적합한 포맷이다. 


 매일 밤 나만의 밀실에서 나는 질문한다. 낮의 많은 장면에 대해서 왜? 냉정하고 무서운 표정들에 대해서 왜? 미쳐 돌아가는 현실에 대해서 왜? 이렇게 마음속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쓴다. 끼리끼리 논다고, 주변에 작가 지망생 친구들이 꽤 있다. 우리끼리 킥킥대며 이런 얘길 한다, 글 쓰는 사람치고 인생 멀쩡한 인간 없다고. 열등감에 절은 못난 인간들끼리의 이야기이니 부디 훌륭하신 작가님들에게는 적용하지 않길 바란다.

     

 이제 여기까지 시청해 주신 분들을 위해 PD로서 치명적인 고백을 하나 하겠다. 내 방에는 TV가 없다. 어릴 때부터 집에 TV가 없었고, 커서는 단칸방 살림에 TV를 들여놓을 생각 자체를 못했다. 그 흔한 유튜브도 일 외에는 잘 보지 않는다. 퇴근 후에 혼자 뭘 하냐고? 읽고 쓴다. 21세기에서 가장 올드한 미디어에 내 단순한 열정을 바친다. 미디어에 떠도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 내 인생이 더 웃기고 아파서, 밤마다 자기만의 스튜디오에서 On Air 램프를 켜고 자체 라이브 방송을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아주 오랫동안 수많은 TV 프로그램과 유튜브 영상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당신은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겠으나, 세상 살면서 이 정도 배신쯤은 다들 한 번씩 당해보지 않으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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