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기#10
명함에 대리를 달았던 영광의 그날, 전국의 모든 '박 대리'에게 바친다는 '사랑의 배터리' 노래를 선물 받은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박대리의 배터리가 다 됐나 보다. 당신 없이 못 산다는 절절한 연가에 속고 사랑의 야근에 지쳐 고장 난 충전지가 돼 버렸지 뭐야. 과장이 되지 못하고 낙오한 박 대리는 배터리가 0%로 뚝 떨어져 폐기 처분 직전에 놓였다는, 아, 이건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슬픈 이야기.
나는 내가 언제부터, 왜, 아무리 충전해도 방전되는 배터리 신세가 돼 버린 건지 알고 싶어져서, 지난 직장인으로서의 세월을 톺아보기로 했다. 비록 '슈퍼 스타' PD는 못 되었지만, 아무렴 밤하늘의 뭇별을 이루는 수많은 직장인 중 하나였을 테니. 내 주변의 무수한 방송계 지인들이 대부분 잦은 이직과 열정 페이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이상하다. 개인들은 무너지는데 도시는 어째서 견고한가. 도시는 언제나 100% 충전 상태다. 번쩍번쩍 잘만 굴러간다. 이 불균형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선 내 변변찮은 직업의 역사를 먼저 펼쳐보기로 한다.
첫 번째 직장
24살, 대학교를 졸업하고 세상 물정 (안다고 생각했지만) 뭣도 모르던 시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예술 공연과 관련된 한 국립재단에 문화기획 인턴으로 들어갔다. 면접 때 곤란한 질문에도 '밝고 솔직하게' 답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뽑았다고 나중에 들었다. 밝고 모습으로 서류 복사만 하다가 권태를 견디지 못하고 몇 달 후 솔직하게 이직했다.
두 번째 직장
24살, 모 방송국에서 AD(조연출)로 일함. 주요 업무는 기획 뉴스 제작, 녹화 보조, 홍보 영상 제작 등. 반년 정도 다니다 적은 월급(월 130만 원) 때문에 이직했지만, 작가, 아나운서, 기자, 편집 감독 등 다양한 파트의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재미있게 회사 생활을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심지어 타 부서 회식 자리에도 초대받아 껴서 놀았던 걸 생각해 보니 이때까지만 해도 외향성과 내향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나 보다. 지금까지도 연락하는 든든한 인생 동지도 여기서 얻었다.
세 번째 직장
25살, 정부 산하기관에서 PD로서 기획 영상 1인 제작. 봇짐장수처럼 혼자 장비를 걸쳐 메고 전국 방방곡곡 출장을 다녔다. 편집철에는 새벽 2~3시까지 야근하는 일이 잦았고, 체력의 한계로 화이트 아웃을 경험하며 복도에서 쓰러져 실려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분명 내 일에 자부심이 가득했고, 열정이 넘쳤다. 동료들의 영상에 시간을 내어 내레이션 대본을 써 주기도 했고(내가 이럴 때가 있었네?), 퇴근 후에도 글을 열심히 쓰면서 시 공모전에서 작은 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 약속을 뒤집으며 영상 인력 대부분을 계약 기간에 맞춰 자르고 다시 뽑음으로써 나도 그 대열에 뒤섞여 퇴사하게 됐다. 배신감에 격분하는 동료들과 달리 나는 "다른 데 가지 뭐!" 하며 훌훌 털어버리던 매우 긍정적인 마인드의 소유자였다. (내가 이럴 때가 있었네?)
네 번째 직장
26~28살, 지상파 방송국에서 막내 PD로 일함. 전담하고 있던 주간 프로그램이 있어서 이때도 1인 제작이 많았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정성스럽게 취재 일기를 써 뒀을 정도로 일에 애정이 있었다. 기자 선배에게 자발적으로 달라붙어 받지 않아도 되는 첨삭을 받으며 예쁨 받고(내가?), 심지어 팀장님은 나한테 웃음이 많다고 비타민이라고까지 했다.(내가?) 마지막에는 잠시 휴직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고, 담당하던 프로그램이 종영되면서 하필 나와 전혀 맞지 않은 연예인 예능 쪽으로 옮겨지는 등 겹겹의 이유로 퇴사하게 되었다. 박봉이었지만 지금까지 연락할 정도로 팀 전체의 사이가 좋았다.
다섯 번째 직장
28~29살, 지상파 방송국의 뉴미디어부에서 일함. 여긴 영상 공장이자 전쟁터였다. 작가팀, 촬영팀, 편집팀, 디자인팀 등 체계적인 공정 속에서 엄청난 효율로 영상을 뽑아냈지만 매일 크고 작은 갈등이 난무했다. 자막 하나라도 틀리면 '니 탓이네 니 탓이네'('내 탓'은 없다) 온갖 뒷담과 앞담이 오갔고 실력에 대한 견제와 질투, 예의 없는 비판, 아이디어 도둑질, 정치질 등의 극단적인 온상이었다. 다양한 유형의 성격파탄자를 만났고, 어쩌다 상사의 오해를 받아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비록 이곳에서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지만, 디자인 툴 스킬과 SNS 감각을 최대 효율로 끌어올렸다고 생각한다. 그나저나 이 회사의 유일한 장점은 구내식당 밥이 맛있었다는 것.(세끼 다 때웠다!) 퇴사할 무렵 상사의 오해가 해소되어 쉬는 날에도 칭찬과 응원의 연락을 받거나 감동의 프레젠테이션을 선물 받기도 했지만, 이미 내 마음은 거기에 없었다. 이 무렵 밤마다 스페인어를 독학 마스터하고 퇴사 후 혼자 중남미를 몇 달 동안 떠돌아다녔다. 돌아와서 작은 사업체의 유튜브 편집 알바와 예식장 홍보 사진 촬영 알바, 전국 영화 관객수 집계 알바를 하며 생활을 연명했다.(일에 익숙해져서 이 알바들 중 일부를 여섯 번째 직장과 1년 넘게 병행했다.) 이때 2.5D툴은 물론 3D툴까지 따로 공부했었는데 지금은 다 까먹었다.
여섯 번째 직장
30~32살, 신문사에서 새롭게 오픈하는 버티컬 채널의 SNS 영상을 담당했다. 기자들로 이루어진 팀에 영상 PD가 한 명 붙어 있는 구조였다. 브랜드 창립 단계부터 함께 했기에, 유튜브 채널의 개설 및 운영, 브랜딩, 제작 실무(기획, 촬영, 편집)까지 영상에 관련된 모든 것을 혼자 했다. 거의 개인 채널처럼 운영하다 보니 내 영혼을 모조리 갈아 넣었고, 그때그때 만들고 있는 콘텐츠가 날씨보다 더 많이 기분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내용에 몰입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경제적 지원과 자료 풀 없이 '회사 공식 채널'을 겨우 '1인'에 의지하는 구조에 큰 한계를 느꼈다. (작은 규모의 회사가 아니었다.) 한편 글 잘 쓰는 기자 선배들이 많아서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랐다. 선배에게 구성안을 칭찬받을 때 신춘문예 대상이라도 탄 것처럼 행복해했다. 방송국에 비해서 신문사에 비교적 순하고 차분한 사람들이 많다고 느꼈다.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따뜻하게 챙겨주는 선배들이 많아서 사적으로도 긴밀하게 지냈다. 2년 정도 일했지만 복잡한 사내 정치와 나의 면접 부진(아마도)으로 인해 정규직 전환에 실패했고, 애정이 컸던 만큼 충격과 낙담에 심하게 빠졌다. 뉴미디어 채널은 말 그대로 새로운 시도, 즉 실험 매체였으므로, 대부분의 경우 투자도 없었고 인력 채용도 실험으로 그쳤다. 비정규직으로 운용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나는 왜 계속 이용당하고 버려지기만 하는가, 내 노동의 가치는 왜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나는 왜 이런 일을 선택했나, 어둠의 나락 속에서 절규하고 절망했다. 한동안 전국의 온갖 사찰을 돌아다니며 명상과 잠언과 선문답의 전문가가 됐다. 지금도 가끔 주변에서 나를 '절언니'라고 부른다. 난 무교임.
일곱 번째 직장
32살. 병든 마음이 다 치유되기도 전, 2달도 안 돼서 얼떨떨하게 재취업했다. 모 방송국에 편집 감독으로 들어갔고, 갓 하산한 도사의 마음으로 업무에 임했다. 이곳에서는 나의 장점인 '올 라운드 플레이'를 내려놓고, 편집에만 집중했다. PD들의 성향을 저널리스트(Journalist)와 아티스트(Artist)로 구분하자면, 나는 아티스트에 속하는 PD였고 그래서 홀로 집중하는 편집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새 업무에 적응해 가던 중, 쉬는 기간에 면접을 봤던 다른 회사에서 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두어 차례 거절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어필하며 노하우를 전수해 주십사 부탁해 왔다. 뱀의 꼬리가 되느냐, 용의 머리가 되느냐. 깊은 고민 후 후자를 선택했다. (이때 욕심을 부리지 않았어야 했다!)
여덟 번째 직장
32~33살. 이 회사, 행복하지 않았다. 여섯 번째 직장과 비슷하게 신문사의 뉴미디어부에서 PD로 일했다. 체계는 심각하게 없는데 원하는 건 산만하게 많고, 그나마 마음이 맞던 동료들이 줄퇴사하여 외로웠다. 땅 파고 돌 갈고 사공들은 각자 딴생각하는 시간. 괴팍한 팀장은 회의하다가 기분이 나쁘면 문을 쾅 닫고 나가기도 하고, 씨X이라는 욕도 서슴지 않았다.(똑같이 책상을 쾅 치면서 "나도 씨X!"이라고 외치고 나가는 상상을, 상상만, 자주 했다.) 그 팀장은 나를 고집쟁이 취급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완성된 영상물은 좋아해 주었다. 한편 생활 면에서 불운했다. 밤마다 고의적으로 층간 소음을 유발하는 정신 병자 이웃을 만나 고통받았다. 온갖 관련 기관을 헤집고 다녔으나 이사 밖에는 답이 없었다. 이웃을 피해 친구 집이나 모텔에서 잔 적도 부지기수. 내 담당 영상만큼은 진심을 다해 만들었지만, 내게는 쉴 곳이 없었다. 항상 피곤하고 자주 무기력했다. 1년이 지나고 나니 "제발 저희 회사에 와 달라, 저희는 절대 거짓말 안 한다, 1년 뒤 무조건 정규직 시켜 준다"고 매달렸던 어르신이 태연하게 계약직 연장 서류를 내밀었다. 집도 싫고 회사도 싫었다. 다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이 너무 고난이도인 것 같아서 점쟁이를 찾아갔는데, 내 인생은 계속 이럴 거라서 굿을 해야 한다고 했다. 망할.
아홉 번째 직장
34살. 한동안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속세를 등지고 살았지만, 결국 다시 모 방송국에 들어갔다. 방송계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은 이미 차고 넘쳤는데, 당장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뉴미디어부였다. 이번에도 팀에 영상 인력은 나 하나뿐이었고, 이번에는 기획, 섭외, 구성, 촬영, 편집, 디자인, 마케팅, 생방송뿐만 아니라 영업과 행사 지원까지 원했다. 물론 박봉이었다. 뇌의 센서에 빨간 불이 켜졌다.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었음'을 감지하고 몰래 면접을 보러 다녔는데 두 군데의 회사에 합격했다. 미련 없이 떠났다.
열 번째 직장
34~36살. 먼저 합격한 회사에 출근하기로 이야기가 끝난 시점에, 두 번째로 연락이 온 곳에서 강력 어필했다. 연봉은 조금 더 낮았지만, 회사의 복지와 안정성(2년 후 정규직으로 전환됨)을 어필해 왔다. 반면 첫 번째 회사는 2년 뒤 바로 '계약 끝'이라고 확실히 말해줬기 때문에 두 번째 회사를 선택했다. 둘 다 방송국이 아닌 일반 대기업의 영상 직무였다. 2년 동안 PD이자 회사원으로서 열심히 일했다. 기획, 구성, 촬영, 편집, 디자인, 생방송을 가리지 않고 다 하면서, 주로 '우리 회사 좋은 회사'로 요약되는 전형적인 기업 홍보 영상을 만들었다. 개성과 몰개성을 동시에 요구받아서 혼란스러웠다. 회사의 비전을 '화려하면서 심플하게, 모던하면서 클래식하게, 대중적이지만 개성 있게'로 바꾸셔야 할 것 같다. MZ세대를 위한 마케팅을 한다면서, 내부적으로는 MZ분자를 색출하고 통제했다. 개인이 튀는 것을 무척 싫어하고, 윗사람의 한 마디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다 바뀌는 흔한 수직적 구조의 대한민국 대기업이었다. 한때는 강요받은 애사심에 몰입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누구의 성과를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이곳에서 월급을 착실히 모아 전셋집으로 이사했다. (그러다 전세 사기에 당했지만?)
과거를 되돌아보고 정리한다는 건 미래를 계획하고 예견하는 것과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고 믿었다. 모든 것이 꼬여버린 것만 같은 이 카오스의 시기에, 나는 생각한다. 불만과 후회와 분노와 설움의 잡동사니 인생 좌판을 펼쳐놓고 과연 여기서 무엇을 건질 수 있을 것인가. 두렵다. 고르고 고른 게 혹시 폐배터리 고물일까 봐. 과거에서도, 미래에서도, 아무것도 건지지 못할 까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