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기#12
석상처럼 앉아 있던 일요일 오후, 문득 월트 휘트먼의 문장이 떠올랐다. "거기, 무력한 그대, 무릎을 펴라!" 나는 무릎을 펴고 밖으로 나가 뒷동산에 올라가기로 한다. 주말마다 햇볕이 드리운 흙길을 걷고, 숲 속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은 나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일상이 무너진 뒤부터는 책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런데 기억에서 휘발된 줄 알았던 시가 이렇게 불쑥 튀어나와 나를 움직이게 한다. 별일이다.
숲은 오늘도 생생했다. 새소리와 나뭇잎 소리가 낭자한…… 삶에 대한 모든 질문을 능가하는, 오직 그 자체의 세계. 그 와중에도 나는 잊자, 하고 생각했다. 그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조급한 '잊자'. 붙잡을수록 빠르게 휘발되는 아름다운 문장들처럼 금세 잊어버릴 순 없을까. 인간의 마음은 그렇지가 못하다지. 이질적인 기분으로 흙길을 걷는다.
봄과 여름과 가을의 색깔을 마르게 벗어놓은 겨울 낙엽들을 본다. 밟아본다. 프스스, 프스스, 하릴없이 제자리걸음 하고 있자니 저쪽에 나처럼 뒤뚱거리고 있는 새들이 보인다. 한동안 새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낙엽을 밟았다. 작은 존재들의 사박거림에 귀 기울이며, 이윽고 내 소리를 죽여본다. 그리고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인다. 거기에는 모든 게 다 있었다. 작은 새들의 발자국도, 처처히 쌓이는 낙엽의 음성도. 바람아, 내 존재도 실어가 주렴. 나 한 줄기 청신한 존재가 되고 싶어…….
다시 도시로 내려올 때, 내 표정은 짐짓 잠잠하다. 언제 무슨 일 있었냐는 듯. 그 틈을 타 나 자신에게 괜찮아, 라고 말해주려고 했다. 조심스럽게, 최대한 태연자약하게…… 앗, 그러나 한순간 내 마음은 간절해지고 말았고…… 오늘도 산에서 얻은 마음, 산에 다 돌려주고 나왔던가. 혼자 올라온 사람을 혼자 내려가게 하는 오늘도 너무한 산아, 산아.
집 근처에 도착하니 거뭇하게 절은 도시 비둘기들이 불법 쓰레기들을 쪼아대고 있다. 그래, 너희들도 새다. 이 새와 저 새를 구분하려 했던가. 가소로워라. 멀어지는 새야, 바람아, 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