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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Oct 11. 2023

사랑해, 울지 마!

퇴사일기#13

 출근 시간 1분 전, 아무렇지도 않다. 잘리고 나서야 평정한 마음을 얻었다. 퇴직 서류를 처리하는 일에는 크리에이티브가 필요 없으니. 하긴, 평정한 마음에 크리에이티브가 있을 리 있나. 그러니 팔다리를 축 늘어뜨리고 앉아 있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오전에는 관성적으로 아이디어 회의에 참여했다. 정제되지 않은 아이디어를 마구 던져 보다가,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싶었다. 아직도 나에게서 뽑아낼 아이디어가 남았나. 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당신들도 내게 크리에이티브한 아이디어를 달라.


 무심코 책상과 책상 사이에 세워진 가림막을 보다가, 가림막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천천히 움직이면서 내 공간을 옥죄어 오는 것을 발견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에서, 면전에서, 뒤통수에서…… 이 참을 수 없는 느릿함을 견디는 것이 나의 마지막 소명인가. 나는 말없이 잡무를 하고, 퇴직 서류를 처리하고, 까딱까딱 졸다가, 채용 공고도 찾아본다. 무기력에 토할 것만 같았는데 밥은 잘만 들어가네…….


 오후에 잠시 나가 유령처럼 회사 주변을 걸었다. 뭘 또 죽도록 해서 살아남아야 할까, 죽도록…… 죽도록 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데 아무것도 하기 싫다…… 내 앞에 초록 신호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깜빡깜빡깜빡깜빡깜빡.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뛰고 싶지 않았다. 숫자가 점점 움츠러들었다. 7, 6, 5, 4, 3, 2, 1…… 빨간불이 켜졌다. 다행이다. 이 빨간 신호 앞에서라면 더 이상 어디로도 가지 않아도 되겠지. 신호등을 노려보며 말했다. 재촉하지 마.


 친한 대학교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동아리 모임을 그만두겠다고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내 사정을 들은 선배가, 나는 퇴사 경험이 많으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보다는 훨씬 더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위로했다. 그리고 그만둔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뛰지 않아도 건너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크리에이티브한 것이야말로 반복되는 실패란 걸. 한 번의 실패는 다음의 실패에 대한 별다른 요령을 알려주지 않으며, 어른의 트라우마는 아이의 트라우마보다 몸집이 더 크다는 걸. 


 "그래도 힘내."


 힘을 내서 횡단보도를 마저 건넜다. 그리고 시간을 건너서, 한강 다리를 건너서, 또 이렇게 무용한 일기를 쓴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힘내'라는 말보다 나를 더 많이 전진하게 한 말은 없다. '힘내'라는 말은 유용하구나, 우습게도, 여전히. 그렇게 걸어 걸어 도달한 곳은 바로 이곳, 책상 앞이라는 낭떠러지. 이제 삶의 마지막 문장은 무엇이어야 하나. 그러나 횡단보도 하나 제대로 건너내지 못하는 느슨한 마음으로 무얼 쓰겠단 것인지. 사무실에서 우두커니 앉아 보낸 시간들은 세상의 끝에서 마지막 문장을 쓰기 위한 예행연습이었나. 헌데 이 막막한 낭떠러지를 어떻게 건너가야 하누. 나는 아직…… 아무 문장도 준비되지 않았는데…… 그때, 예전에 베껴 놓은 시의 한 구절이 눈에 띄었다.


 인류! 사랑해, 울지 마!


 사랑한다니, 울지 말라니, 아아, 당신은 누구신지……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고, 인류애가 온통 바닥났다고 말하고 다닌 나에게, 당신은 도대체…… 이 밤, 당신의 말이 유용해서 목 놓아 운다. 세상의 끝에서 방황하는 나에게 도착한 마지막 문장, 힘내. 사랑해. 울지 마. 


 아무 문장도 쓰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또 하나의 밤을 건너간다. 건너낸다.


허수경, <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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