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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Oct 11. 2023

다만 가방을 꾸릴 것

퇴사일기#14

 채워져 있던 자리가 조금씩 비워져 간다. 사무실 가벽에 덕지덕지 붙여 놓았던 포스트잇과 자석들을 떼어내고 버렸다. 책상 밑에 뒀던 비상용 운동화도 챙겼다. 오랜만에 보는 허전한 공간들이 그동안 내가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을 불러온다. 여기저기 물건을 풀어놓았던 건 난데. 나는 이곳에 오래 머문 손님이었을 뿐인데. 벽에 붙인 모든 메모를 떼어냈을 때, 갑자기 속에서 쏟아지던 울음이 멎는다. 나는 누구지? 나는 왜 울고 있었지?


 생각 하나가 뒤집힐 때마다 세상은 반전된다. 자꾸 뒤집히는 세상은 시 같다. 시를 읽고 쓴다는 건 일상에서 의외성을 발견하는 일. 그렇다면 나는 지금 시의 순간들을 살아내고 있다. 시를 쓸 줄 몰라서, 시로 살아간다. 속이 자꾸만 뒤집히는 사람들이여, 쓰자, 우리는 시다.


 직업이라는, 회사라는 겉옷을 너무 오래 입고 있었다. 이제 착각의 겉옷을 벗을 때가 되었다. 오늘은 경칩이었다. 나는 겹겹이 입고 있던 옷들을 차례차례 벗어서 원래의 자리에 걸어두었다. 떠나자. 울지는 말고. 시간을 그만 세야지. 다만 가방을 꾸릴 것. 둘 것은 두고, 챙길 것은 챙기고. 그동안의 착각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으므로, 언젠가 이 시절도 나의 추억들과 나란히 공존하게 되리라. 


 읽지 않은 시집들을 품에 안고 스러지는 햇빛 속으로 찰박찰박 걸어 나왔다. 사양(斜陽)이 붉었다. 이대로 흘러가는 시간을 수수하게 기록하기만 해도 될 것 같았다. 퇴근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잔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시야를 약간 가렸지만 이렇게 헝클어진 일상을 사는 것이 내겐 익숙하다. 나도 모르게 해를 정면으로 바라봤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어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고, 서서히 초점을 되찾았다. 


 오늘 내 마음에는 분노가 일지 않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버스에 몸을 싣고 오늘도 한강인 한강을 바라본다. 한 시인이 그랬던가. *착각은 시인이 이 지상에 개점한 여관에 든 손님이라고. 손님으로 와서는 어느 사이 여관 이름마저 '착각'이라고 개명해버렸다고. 가방을 꾸리고 나니 선명해진다. 어떤 집단에 얼마나 오래 소속되든, 사실은 며칠 머물다 가는 여관과 매한가지라는 것……. 멀어지는 한강에서 윤슬이 차곡차곡 일렁였다. 기사님, 저 이제 막 '착각 여관'에서 체크아웃했답니다. 제 것 아닌 것들은 두고, 제 것들은 잘 챙겨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랍니다. 한 시절의 탑승객으로서 잘 부탁드립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바람이 다시 한번 이마에 찰랑 와닿았고, 그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득히 영글었다. 나와 당신이 살아낸 시의 순간들이 모두 거기에. 지하철 플랫폼으로 내려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안고 어디론가 바삐 걸어간다. 오늘 하루 그대들도 힘들었지요? 문득 한 명 한 명에게 파이팅을 외쳐주고 싶다. 들불처럼 번지던 마음이 다 어디로 갔을까. 흘러간다. 흩어진다. 사라진다…… 이대로 불립문자의 시간을 받아쓴다. 역마다 허위허위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도 내 마음은 잔잔했다.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정리하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채워져 있던 자리가 조금씩 비워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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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오늘의 착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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