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기#11
요즘 내 모든 일상은 '잘린 주제에'로 시작된다.
잘린 주제에 지각? 오늘 아침 눈을 뜨니 7시 50분이었다. 50분……? 8시? 미친! 나는 평소 7시쯤 도착한다. 지금 이 시각은 회사에 도착해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업무가 한창 중인 시간이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는 걸 힘들어하는 데다 약간의 강박증까지 있어서 기상 알람을 5분 간격으로 10개 이상 맞춰놓는 사람인데, 그걸 다 못 들었단 말이야? 어째서 이런 일이? 생각이 '내가 이렇게까지 한다고?'까지 흘러갔을 때 나는 비로소 멈췄다. 아니, 네가 뭔데? 네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너는 원래 허술했어. 나는 항변한다. 나 이런 적 처음이야, 내 유일한 강점이 성실함인데? 내가 지금까지 빈 사무실에 문을 열고 불을 켜는 순간들 못 봤어? 그는 씨익 웃는다. "역시 널 자르길 잘했어."
잘린 주제에 떡볶이? 가계부를 보니 일주일 넘게 지출이 0이었다. 통장에서 전세 대출 이자가 세 자릿수로 빠져나간 사건은 너무 큰 트라우마로 남아 버렸고, 나는 아직 여진과 충격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이걸 적어도 6개월 동안 계속 해야 한다고? 그러나 배는 눈치 없게 꼬르륵거렸고…… 그야말로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은' 마음으로 퇴근길에 식재료를 사 왔다. 모든 것은 최저가로, 세일 상품으로. 떡 약 1000원, 어묵 약 1000원, 깐 양파 2개 3500원? 용서할 수 없을 만큼 비싸니까 패스, 대신 양배추 한 토막 약 1300원,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대파는 제일 작은 걸로 약 2000원. 가방에 식재료를 주워 담고 지하철을 타는데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갑자기 내 인생이 웃긴 것이다. 동네 사람들! 여기 제 가방에 떡볶이 재료가 있어요! 그리고 전 회사에서 잘렸어요!
잘린 주제에 드립 커피? 커피를 내려 마시고 씻어둔 드립 서버를 정리하다가 실수로 놓쳐 버렸다. 내 키 높이에서 탄력을 받고 떨어진 유리 서버는 육중하고도 투명한 공명음을 자랑하며 온 집안으로 와라랑 흩어졌다. 마치 마지막 내 수호신이 날 떠나버린 듯, 나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당신마저 날 떠나나요, 왜요, 도대체 왜? 커피의 신이 날 내려다보며 말한다. "You, are, fucking fired!"
잘린 주제에 책? 좋아하는 작가님의 신간 소식을 듣고 말았다.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몇 번이나 망설이다 결국 서점으로 향했다. 에라, 모르겠다! 웬만한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보지만, 문장마다 자꾸 호흡을 멈추게 하는 책, 필사하다 보면 거의 모든 문장을 필사하고 말게 되는 책은 가능하면 구매한다. 내가 원하는 책은 손이 닿지 않는 높은 위치에 딱 1권 꽂혀 있었고 나는 그 책을 가지고 싶어서 까치발을 하고 팔을 버둥댔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닿을 듯 말 듯 손에 잡히지 않았다. 책은 저 멀리서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너는 잡을 수 없는 별이야? 이룰 수 없는 꿈이야? 견딜 수 없는 슬픔이야?…… 사다리를 타고 하늘 끝까지 올라가고 싶었지만 사다리는 직원용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완고한 표정의 사다리를 내버려 두고, 좀 더 친절해 보이는 북 캐셔 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분은 사다리 없이도 손을 쭉 뻗어 쉽게 책을 낚아채 주었다. 감사합니다, 저 사다리는 좀 못 됐어요 그치요, 당신은 저의 돈키호테예요……. 그런데 3500원짜리 양파 앞에서 벌벌 떨던 주제에 15000원짜리 책을 사다니, 너 어쩌자고 이러는 건데? 지금 반항하는 거야? 진짜 언제 정신 차릴래?
집에 오자마자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첫 문장이 태연하게 나를 반겼다.: 조심해. 울다가 웃으면 어른이 된다. 나는 충격을 받고 말았다. 나, 어른이었어? 이 내가……? 어른의 조건이 울다가 웃는 것이라면, 나는 도대체 얼마나 성숙한 어른이란 말인가.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어욧! 나는 뒷걸음질 친다. 아니야, 어른은 고작 이런 게 아니야. 난 그냥 울 테야. 난 그냥 웃을 테야.
잘린 주제에, 사치스럽게 새 책과 함께 '불금'을 보냈다. 책상 앞에 앉아 111페이지의 작은 책을 다 읽었다. 문장이 날 얼어붙게 한다. 문장이 내 영혼을 환하게 한다. 문장이 현실에 복종하지 말라고 한다. 문장이 지각과 떡볶이를 용서해 준다. 허나, 111페이지 동안 양팔을 벌리고 날 안아주던 책은…… 어느새 하얗게 등을 돌리고 홀쭉해져 있다. 안 돼요, 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요! 그래서 웃다가 울면 뭐가 되지요? 다시 아이가 될 수 있나요?……
나는 대체 어쩌자고 이러고 있는 걸까. 잘린 주제에 어쩌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