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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Oct 11. 2023

버려진 모니터 안에서 술을 마시는 여자

퇴사일기#08

 무관심과 무중력 속에서 쓸모없이 앉아만 있던 하루였다. 사무실 내 자리는 동동 떠 있는 외딴 우주 같다. 어둔 새벽에 출근하고 어둔 밤에 퇴근했던 수많은 날들…… 이제 족쇄를 풀어준다는데, 내 마음은 왜 의자에서 일어날 생각을 못 하나. 오늘도 지하실의 공기는 퀴퀴했고, 내 자아는 저 멀리 어디선가 웅크리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것 같다. 낮이다, 취해도 곱게 취하자꾸나.


 이제 술 생각만으로도 취하는 경지에 도달한 걸까. 낮인지 밤인지 불분명한 지하실에서, 취한 상태로 할 수 있는 건 그다지 없었다. 오늘은 그동안 작업했던 파일을 정리하려 했으나 폴더를 제대로 열어보지도 않았고, 점심시간에는 좀비처럼 목을 대롱거리며 잤다. 그런데도 정신이 각성되지 않아 남몰래 해롱거리는 가운데, 오후에는 촬영 현장에 따라 나갔지만 흡사 유체 이탈의 상태였다. 세상이 나를 두고 10배 정도의 속도로 먼저 흘러가는 것 같다. 나는 어디에 멈추어 있으며, 이 시각 내 안에 무슨 장면을 각인하고 있는 걸까.


 모니터에 오랫동안 같은 화면을 띄워놓으면 전원을 끊어도 잔상이 남게 된다. 그걸 '번인 현상(Screen burn-in)'이라고 부른다. 고정된 위치에 같은 장면이 너무 오래 노출되면 빛과 열에 의해 화면이 망가지는 것이다. 사무실에 그렇게 버려진 모니터가 하나 있다. 수명이 소모되는 모든 것은 그런 식으로 망가지는 게 아닐까. 나도 이제 그 모니터 옆으로 가야 할 처지가 되었다. 나는 무엇에 반복 노출되었는가. 내 원래의 빛깔은 무엇으로 인해 흐려졌는가. 이제 내가 영구적으로 안고 가야 할 자국은 어떤 모양인가.


 나는 늘 새로운 것을 생각해야 하는 직업을 가졌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내 안의 새로운 것들은 수많은 회사를 거치며 지나치게 앞당겨 소모되었으며 애석하게도 나는 새로운 것이 끝없이 샘솟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나에게는 새로운 것이 가장 고리타분하다. 이 스마트한 세상에서 새로운 것이란 터치 한 번에 헌 것으로 추락하기 마련이고, 한 분야의 장인들 또한 그런 식으로 해고되며, 아마도 망가진 모니터 안에는 추락한 것들의 무덤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앞에 주저앉아 밤낮없이 술을 마시며 잊힌 것들을 위해 울어주리라.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잔상을 베개 삼아 무지근한 잠에 들 것이다. 아무도 망가진 모니터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화려한 도시의 뒤켠에는 꺼도 꺼도 꺼지지 않는 폐품들이 쌓여 간다. 크리에이티브의 무덤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서로의 얼굴에 새겨진 낙인을 향해 술잔을 든다. 버려진 것들을 위해 한 잔, 망가진 것들을 위해 한 잔, 어둠 속에서 눈 감지 못하는 존재들을 위해 또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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