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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Oct 08. 2024

가을에도 봄이 온다

#16

꽃무릇이 피고 있다니! 


육성으로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두 해만에 만난 꽃무릇이었다. 세상이 여전히 숨 막히는 열대야에 잠겨 있던 9월의 어느 날, 길 위에서 꽃무릇의 꽃봉오리들을 만났다.



아, 꽃무릇이 피기 시작할 때는 이런 모습이구나…….


일 년 전, 한껏 소슬해진 바람이 칼칼 불어오던 이맘때, 잿더미처럼 시컴하게 타버린 꽃무릇을 보고 돌아와 이렇게 썼다.


'지겹다. 이 지옥 같은 문학만이 나의 구원이라는 사실이. 이게 구원의 다라는 것이. 구원이 고작 이런 거라는 게. 뭐 이런 사이코 같은. 문장들아, 나를 위로하지 마라.' 2023.10.07.  


몇 줄의 문장, 몇 송이의 꽃 속에 은둔하며 스스로를 부정하고 온 세상을 적개하던 나. 나의 나쁨을 내장까지 싹싹 발라버리겠다는 듯이. 사실은 내가 그 미친 사이코라고 악악대면서. 이제(벌써!) 그때보다 한 살 더 먹은 언니가 되어 어렵사리 지난 일기를 펼쳐 보니(그때보다 크게 나아진 것도 없으면서) 괜스레 마음이 욱욱하다.




나에게 읽기와 쓰기란 무엇이었을까. 현실의 모든 것을 상실한 나는, 나조차도 알아볼 수 없는 메모를 강박적으로 끼적이면서 숲 속을 헤매고 다녔다. 숲 속과 책 속이 구분되지 않았다. 종이 위에서 나는 유일하게 내가 될 수 있었고, 그렇게나마 기워진 파편은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혼란스러운 증거가 되었다. 나는 글을 읽은 것도, 쓴 것도 아니었다. 글로부터 끊임없이 구원받고 추방되기를 반복하며, 글을 앓고 있었다. 때로는 책상을 쾅, 치면서.


종이 위에서 은둔자와 바깥세상이 만나듯, 꽃 앞에서 일 년 전의 가을과 지금의 가을이 만난다. 나는 평행 우주와도 같은 또 다른 가을에 서서 문득, 지난 나를 위로하고 싶다. 침묵으로 나를 걸어 잠근 채 오직 종이 위에서 울고 던지고 소리 지르던 나를. 그러니까 날 위로하려 들지 말라고, 당장 꺼져버리라고 소리치던 그 문장들은, 바로 내가 쓴 거였구나. 넌 나를, 쓰기도 전에, 읽고 있었구나. 미안해. 이런 문장 밖에 쓰지 못해서. 너에게 거절당할 글이란 걸 알고도 나는, 쓰고 있단다. 네가 버텨주었기에 지금의 내가 이렇게,


꽃무릇을 보잖아.  


*꽃무릇은 꽃이 다 진 다음 잎이 난다.




꽃무릇이 면, 가을이 시작된 것.

꽃무릇이 지면, 추위가 시작된 것.


꽃무릇은, 눈여겨보지 않으면, 폈다가 졌다는 것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알 수 있다. 아예 모를 수도 있다. 모든 걸 다 보고 나서도 그랬던가, 싶을 수도 있다.




꽃무릇이 피었다. 일 년 중 약 일주일 밖에 볼 수 없는, 하물며 생시에는 꽃과 잎이 서로 만날 수 없는 기구한 사연을 지닌 꽃. 꽃을 우연히 목도함으로 인하여 나는 독자적인 새해를 맞이한다. 이 순간 꽃은 나의 태양이다. 나의 시선은 동쪽을 향한다. 많은 태양이 무릎 앞에 있다. 가을에도 봄이 온다. 이제 나는 단호하게 과거를 잊고 싶다. 까지의 삶을 완전하게 끊어내지 않으면 이어서 살아갈 수 없었으므로, 나는 일생 안에서 하많이 죽었고 하많이 다시 태어났다. 구원을 부르짖던 나도 사실은 그때의 새것이었다.  하나 알게 된다. 환생을 끊어 해탈에 이른다는 것은, '일생 안에서' 거듭되는 환생, 즉 끊어내는 마음 자체를 끊어낸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사기당한 나, 실연당한 나, 해고당한 나. 내가 아닌 나, 믿을 수 없는 나, 변해버린 나. 가망 없는 나, 방치된 나, 가난한 나.  수 없는 나.


리고  모든 를 세어 본다는 망상.


버렸던 나를 다시 버릴 때마다 곱절의 절망이 필요했다. 질곡에서 다시 태어난 만큼 더 질긴, 더 못난, 더 미운 오리 새끼가 자꾸만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나는 또 하나의 생을 마감하기로 결정했다. 



오랜 세월 나를 정좌하였다. 혐오와 절망, 망집에 사로잡힌 채 오직 글을 썼던 시간은 그때는 출처를 알 수 없었던, 시간 너머의 글쓰기까지 포함한 나를, 숙독하고 있던 시간이었다. 놀랍게도 지금 나는 과거의 나를 향해 편지를 쓰고 있으므로. 나는 경멸하며 읽고 있는 내가 미래에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없었으며 내가 쓰는 글이 오래전에 이미 거절된 문장들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써 나가야 했다. 더 많은 과거에게 거절당하기 위해서. 가장 순수한 나에게 닿기 위해서.




그래서 읽기와 쓰기란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그만 읽으려는 나와 그만 쓰려는 나는 누구였을까. 활자들은 나의  세상이 어 나를 무자비하게 학대하다가도, 마지막 페이지다다르면 부드럽게 정체되며 자신의 왕국에서 가장 눈부신 모서리를 펼쳐 보이곤 했다. 드디어 사랑을 허락한다는 듯이. 환히 열리면서. 그리하여 뒤돌아 보는 순간, 집어삼켜졌다. 다시 거기였다. 다시 미래를 잃고 쓰여진 문장이었다.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꽃과 잎처럼 나와 나는.




며칠 전 내가 가장 아끼는 렌즈가 고장 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담을 수 없는 이미지와 잡을 수 없는 순간이 더욱 명징해지고 있다. 꽃, 잎, 꽃, 잎……


그건 꽃이었고, 그건 잎이었다. 그건 당신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묻지 않는다. 그건 구원되지도, 추방되지도 않는다.


잡을 있다. 잡으려 하지만 않는다면. 알 수 있다. 어떤 나무들이 내 머리 위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고, 나무의 시선에서 그것은 분명한 하나의 꽃인 것이다. 




꽃무릇이 피었다. 그랬던가, 싶은 날도 올 것이다. 오늘은 홀로 갈기갈기 울며 배회하던 지난 계절의 나들에게,  생화 한아름 건네고 싶다. 그리고 꽃봉오리가 스스로를 펼쳐내는 강인한 힘으로, 나는 다시 살아갈 것이다.




이 글은 내가 나에게 쓰는 편지이며, 기쁘게 받아 쓰는 계절의 유언이다.




내가 머무르고 싶었던 곳은 집 안도 집 밖도 아닌, 가을 아니었을까.




매우 조심스럽게 '알겠다'고 쓰는 순간, 어떤 새도 새장 안에 갇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책에 대해서는 아직도 과도한 집착과 증오를 넘나들고 있긴 하다. 이것은 연애 중이라고 해두자.




다시 나를 구난하기 시작 것이고, 다시 나를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바로 내일 나는 다시 만취하고 뒤틀리며 절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글 속에서 꽃과 잎은 언제나 함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의심보다 신비로운 의심 속에서.




 송이의 꽃무릇 때문이라고는 쓰지 않으련다. 오늘의 글은 그동안 내가 비참하게 지친 채 무한대로 걸으며 광란한 고독 속에서 만났던 수많은 꽃과 나무, 열매가 내 안에 심어놓은 것이다.




그때, 황폐한 풀밭에서 네 주변을 맴돌던 문장들 말야, 나였어. 난 너의 나비야. 흐트러진 꽃을 좋아하는 이상한 나비.




언젠가 꽃무릇이 아름답다는 선운사에 가보고 싶다. (아마도 미래는 이런 방식으로 꿈꾸어지는 것.) 거기… 만날래요?




2년 전
1년 전
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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