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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Oct 27. 2024

우리도 언젠가 구부러지겠지

#17


그 해에 나는 아주 조금 자랐을 것이다. 만약 나에게도 나무처럼 숨겨진 나이테가 있다면. 그 해에 뻗어낸 줄기는 형편없었을 것이다. 살아온 흔적이란 어느 한 단면에서는 너무도 쉽게 발각되는 것이다.




이른 오전 출근길, 숲을 지나칠 때 가슴이 철렁 했다. 너무 춥게 입고 나왔나. 오늘은 추운 하루가 되겠네, 떨면서 중얼거렸다. 그때, 나무들을 보았다. 구불구불 뻗어 올라간 거대한 상승의 군락지. 그러나 나에게 하늘은 너무 멀었고, 보잘것없는 내 시야에서 줄기들은 그저 곧게만 보였다. 순간 내 마음에 정심이 입혀졌다. 잔가지 같은 잡념들이 정한 직선으로 모두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자 하루아침에 여름에서 가을이 되어버린 것처럼, 직전까지의 전체가 어제로 정리되었다.


곧게 뻗었다고 믿었던 것들도 언젠가 구부러지겠지.





*This Line is Part of a Very Large Circle. 이 선은 아주 커다란 원의 한 부분이다.

<Ono Yoko: YES YOKO ONO> 오노 요코의 전시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yokoonoofficial/




오랫동안 책상 위에 올려 두었지만 펼쳐보지 않았던 새 책. 그 책을 펼쳤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미궁에 빠졌다. 이해하기 위해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는 순간, 더 깊은 몰이해 속으로 빠지는 것이었다. 한참 동안 끙끙거리면서도 끝내 책을 손에서 놓지는 못했다. 결국 점심 식사를 걸러야 했다. 나에게는 호흡 유지를 위한 활자 자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의 점심 산책 이야기다. 숲을 걷는 내내 문장이 낸 낯선 길을 탐방하는 것 같았다. 




미궁의 숲 속, 문득 당연하지 않은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순간적인 본능으로 뒷걸음질쳤다. 소나무들이, 놀라울 만큼 매끈했다. 마치 이곳이 자신의 원산지라는 듯이. 동시에 까칠한 맹아지들로 수북이 뒤덮여 있던 도시 소나무들의 모습이 스쳐갔다. 그건 힘들다는 신호였다. 뿐만 아니라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불현듯 귀가 열렸다. 미안하다고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너희에게도 있었을 거야. 잔가지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살았던 시간이. 



찍어둔 사진이 없어 2022년의 사진으로 대체한다.


리기다소나무의 줄기에서 삐죽삐죽 튀어나온 작은 가지들을 '맹아지'라고 부른다. 불편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생겨난 비정상적인 가지다. 한마디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신호다. 리기다소나무의 원산지는 북아메리카이며, 그들의 성격은 무척 예민하다.


누가 소나무더러 척박한 땅에서도 의연하다 했던가. 




올해 당신의 나이테는 얼마나 자라고 있는가. 당신은 얼마나 많은 맹아지를 깨워내고 있는가.


나는 그런 당신을 오래오래 지켜보고 싶다.


비옥한 땅에서는 패배하는 당신. 너무 힘겹게 자라고 있는 당신. 사랑스럽고 불편한 당신. 

.

.

.


10월 20일의 산책 메모. 사진은 모두 다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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