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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Nov 24. 2024

다시 안녕, 나의 금빛 바다

#18

묵혀두었던 10월의 혼잣말. 그러나 결국 또 흘러가버렸음을 깨닫는다. 흘러감의 기록.




그 해 무망하게 떠나보낸 바다를 생각했다. 금빛 윤슬로 흐르던 나의 바다, 날 두고 떠나가겠다고 속삭이던 삶이라는 꿈. 바다는 끝내 나를 미치게 하지 못했다. 그건 순전히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생활 세계에서는 나를 까마득 외계에 잠겨 있는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몽상과 광기와 시경(詩境)…… 그리움.


다시 한번 그 바다를 보고 싶었다. '보고 싶다'는 점차 '봐야만 한다'로 바뀌었다. 나는 나로부터 버림받은 그 시간을 사실은, 무척 아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조차 나를 거들떠보지 않던, 고독을 벗어버리고 떠나려던 나와, 나 없이 깊게 익어가던 고독을. 그때와 같은 시월이었고, 숲은 만조였고, 이삭들은 이지러질 예정이었다. 작별 인사를 하리라. 세상의 허락은 필요 없었다. 도망이라는 상책이 있지 않았던가. 나는 기어이 도시로부터 도망쳐 나왔다. 도둑질한 두어 시간을 자루에 쓸어 담아. 



바다의 입구. 문은 열려 있었다. 세상이 추워질수록 헐벗은 채 스르륵 열리는 문. 열린 문틈으로 눈부신 금빛이 반짝였다. 저기야. 목질의 문을 두드린다. 살아 움직이는 여닫이문. 두 그루의 삼색버들 사이를 통과한다. 온종일 홀로 앉아 희망을 폐기하고 절망을 꿈꾸던, 내 생에 가장 캄캄하고도 환한 세계로.



문을 통과하자 바람이 불었다. 마치 연주회에 지각한 관객처럼, 계절의 한가운데를 맞닥뜨린다. 솨솨솨솨… 휩쓸리고… 휘이이이 들리고…… 쓰르르르…… 스러지고…… 차르르르…… 흘러가고……


흘러가네, 바다. 그토록 오랫동안 우두커니 바라봤던, 산다는 일에 대한 아무런 사명도 없이 계절의 물결에 몸을 던지고 싶었던, 여전히 내 마음 시어지게 하는, 안녕, 나의 금빛 바다. 너에게 인사를 하러 왔어. 넘어지고 추락하며 여기까지 왔어. 응, 혼자서 자꾸만 대답하면서 왔어. 응, 정말로 힘들었어. 네가 흐르는 건 어떻게 하는 건지 가르쳐 주지 않았잖아. 네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날 떠나갔잖아.


"난 널 떠날 예정이야."


흘러갔다가 흘러 돌아 바다의 대답. 흘러 갈…… 흘러 돌아올…….


바람결에 잠시 영혼을 내려놓는다. 대답인 질문도, 질문인 대답도, 바람 한 자락에 살포시. 그냥 맡기는 거야. 대답하기를 쉬어 보는 거야. 유유해지는 거야. 연습해 보는 거야. 르는 대로 살아간다는 건, 가르쳐줄 수가 없는 거야.



삼색버들 밖에서는 아주 짧은 시간이 흘러갔을 것이다. 도시에서 훔쳐낸 건 고작 두어 시간. 그러나 풀결 위로는 무진장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여기가 내 고독의 방이라면, 나는 다시 세상으로 외출해야 하는 거네.


피식.

 

마지막으로 내면의 풍경을 뒤돌아보는 순간, 풀결이 그윽하게 흔들렸다. 한순간의 흔들림. 스쳐가는 작별 인사. 흘러가버림. 흘러간 것들을 끄적거리면서 멈칫거리면서 뒤돌아보면서 중얼거리면서 셔터를 누르면서… 나는 또 살아가겠지. 뒤돌아보는 마음으로 되돌아왔으니 나도 잠시간 바다에 잠시 몸 실었을 거나.


응, 일 년을 더 살아내었어.


응.

.

.

.


*한 해 전의 일기.




혼잣말1.


하늘을 나는 방법을 배우러 간다더니

스스로 하늘이 존재들아


깃털 하나 가져갈 수 없는 것이

하늘된 마음이라고

내게 말하지는 마


마음에 골다공증이 숭숭 들어야만

비로소 인간된 마음이라고

그렇게 말하지는 말어


(새는 말보다 가벼운 깃털조차 놓아두고 갔는데!)



혼잣말2.


낙일에 다다른 존재들은 지쳐 보인다. 꽃잎도, 나뭇잎도. 한 잎 한 잎. 세상을 향한 아름다워 보이고 싶음을 드디어 내려놓고, 이제는 그만 배경이 되겠다는 듯이. 꽃이 아니라 마음이, 떨어지겠다는 마음이 완성되어 떨어졌다는 듯이.



혼잣말3.


지나가던 사람이 말을 걸었다.

"이 열매는 뭐예요?"

"산수유예요."

"에이, 아닌데? 산수유 열매는 이렇게 안 생겼어. 이거 구기자 맞아."

"..."


나는 말없이 웃었다. 예, 그대가 구기자라면 그건 구기자지요. 나에게 산수유라면 그건 산수유이듯. 나는 잠시 서서 사계절 그 자리에서 보았던 노란 꽃들과 설익은 열매들을 떠올렸다. 인간의 언어로 갖다붙인 이름이 무슨 대수일 저. 다만 자신만의 결실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만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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