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 지나 종례가 끝나고 지훈이를 교무실로 불렀다. 지훈이는 영문도 모르고 교무실로 와서 주변을 살피더니 내가 권하는 동그란 의자에 앉았다. 난 새로 산 도화지를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 지훈이에게 건넸다. 열몇 장쯤? 많으면 스무 장 정도 되는 분량이었다. 도화지를 받아 든 지훈이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난 지훈이를 향해 천천히 말했다.
"지훈아, 앞으로 그림은 여기에 그려라. 조회 시간, 쉬는 시간, 점심시간, 그리고 집에 가서 마음껏 그리고 싶은 만큼 그려라. 다 그렸으면 샘한테 가져와. 새 종이로 바꾸어줄게..."
"샘 정말요? 와... 고맙습니다"
지훈이는 깍듯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조회 시간에 보니 지훈이는 도화지를 꺼내놓고 막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난 눈짓으로 '그래, 마음껏 그려라'라는 신호를 보냈다. 지훈이는 그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지훈이를 보며 내가 중학교 다닐 때 미술 시간이 떠올랐다. 새로 개교한 지 1년을 넘기고 있었던 그 시골 학교에선 대부분의 교사들이 두 과목씩 가르쳤다. 1학년 때는 수학 교사가 미술까지 맡아 가르쳤었다. 하루는 교탁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그리라 했고, 하루는 준비물을 챙기지 못한 친구를 교탁 앞에 모델로 세워 두고 인물화를 그리라고 했다. 시간마다 미술 도구 준비를 하지 못한 아이들이 불려 나가 손바닥을 맞았고, 복도로 쫓겨나거나 교탁 앞에 서서 모델을 했다.
그러다가 2학년이 되어 첫 미술 시간을 맞았다. 난 기대가 컸다. 진짜로 미술을 전공한 선생님이 발령을 받아 오셨다. 첫 시간에 진짜 미술 선생님은 고흐의 화집을 가지고 들어왔다. 한 장씩 넘기면서 고흐의 삶과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은 금방 지루해했다. 화집이 중간쯤 넘어갔을 때 난 강한 전율을 느꼈다. 화집 속 '주아브 병사'에서였다. 그림 속의 군인은 휴식을 취하듯 앉아 있는데 정면을 바라보는 눈과 굳게 다문 입, 무심하게 늘어 뜨린 큰 손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병사가 입고 있는 치마는 마치 붉은 물감이 배어 나오듯 생생하고 강렬했다. 물감을 짓이겨 덧칠한 것 같은 고흐의 그림들 앞에서, 그리고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난 설렜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 '해바라기', '감옥 속을 걷는 사람들'을 연이어 보았다. 거의 아무도 듣고 있지 않았지만 선생님은 설명을 이어갔다. 나에게는 강렬한 설렘의 기억으로 오래 남아 있다.
며칠 후 지훈이가 그림을 다 그렸다고 가져왔다. 연필과 색연필, 때론 볼펜을 사용해서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림을 그린 듯했다. 꽃, 나무, 동물, 학교 풍경 등이 있었다. 나는 말없이 지훈이의 '작품'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새 종이를 다시 한 움큼 집어 지훈이에게 건넸다. 지훈이도 별 말없이 새 종이를 받아 들고 교실로 갔다. 그날 5교시가 끝나고 였을까. 이미영 선생이 내 자리로 왔다. 그런데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 단단히 따지려는 분위기였다. 이미영 선생은 말했다.
"선생님, 어쩌면 이럴 수가 있어요? 오늘 국어 시간에 그놈이 또 공부는 안 하고 낙서를 하지 않겠어요? 이번에는 아주 버젓하게 도화지를 꺼내놓고 낙서를 하더군요. 나참 기가 막혀서... 근데요. 문제는 그게 아니고... 제가 '너 또 낙서하니? 아주 도화지까지 준비했구나...' 이렇게 야단을 쳤더니 글쎄 이 놈이 뭐라 했는지 아세요?"
이미영 선생은 속사포를 쏘아 대듯 말했다.
"예, 뭐라 하든가요?"
"그 놈이요. 아주 억울한 표정을 하고서는 '우리 담임 샘이 여기다 그리라고 했는데요?' 이러지 않겠어요? 제가 담임 샘에게 부탁드린 것은 이 놈이 수업시간에 낙서하지 말고 공부 좀 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선생님은 오히려 도화지까지 주면서 그림을 그리라고 했으니 이건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요?"
"예, 제가 도화지를 주면서 그림을 그려보라 한 것은 일단 맞지요... 근데 그놈이 국어 시간에 도화지를 꺼내 놓고 그렸군요... 선생님께서 화를 내실만도 합니다."
오늘 이미영 선생은 나에게 문제제기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교육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듣지 못해도 최소한의 공부는 하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담임과 교과가 공동 보조를 맞추어야 아이를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와 같은 말을 더 하곤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난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 사실 해명할 말이 없었다. 나 자신도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닌데, 그저 지훈이에게 학교가 너무 지루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인데 이미영 선생은 정색하고 나의 교육관까지 운운한 상황이었다. 그리고도 두어 번 지훈이는 그림을 그렸다고 가져왔고, 새 도화지로 바꾸어 갔다. 난 다시 반복했다.
“지훈아, 그림 그리는 시간 정해준 거 기억하지? 조회시간, 쉬는 시간, 점심시간이야. 그 시간에 맘대로 그림을 그려도 좋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다.”
그때마다 지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림을 가져오고 새 도화지로 바꾸어 주길 몇 번 더 하니 한 달이 지나갔다. 교무실에서 아이들이 다 빠져나간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지훈이가 그림을 가지고 왔다. 난 잠시 놀랐다. 지훈이의 그림이 달라지고 있었다. 이번에 가져온 그림은 여전히 식물과 동물들, 학교 풍경이었지만 지난 그림에 비하여 훨씬 느낌이 좋았다. 그림을 한 장 한 장 넘겨 가며 유심히 바라보던 나는 지훈이에게 말했다.
"지훈아, 이번에는 그림이 많이 달라 보여. 여기 선 처리한 것도 분명하고, 또 이쪽 색연필을 쓴 곳은 나름 배색을 맞춘 것 같은데?... 그래, 새 도화지를 또 줄 테니 또 그림을 그려 보거라..."
지훈이의 볼이 움찔 거리는 것이 보였다. 담임의 반응을 듣더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선생님, 정말이에요? 제 그림이 많이 나아졌어요?"
지훈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새 도화지를 받아 들고 씩씩하게 문밖으로 나갔다. 창에서 들어오는 빛이 지훈이의 어깨에 닿았다. 경쾌한 뒷모습이었다. 한 번 칭찬을 받고 나니 그때부터 지훈이의 그림은 하루가 다르게 세련된 모습을 보였다. 아이들이 지훈이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더는 수업 시간에 그림을 그리는 지훈이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처음 내 말대로 지훈이는 수업 시간 외의 여러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집에서도 그림을 그렸다. 그때마다 난 그림을 보고 느낀 점을 이야기해 주었다. 어떤 이야기도 지훈이는 스펀지처럼 받아들였다. 미술 선생도 내게 와서는 지훈이의 그림이 좋아졌다고 전했다.
아침에 조회하러 교실에 들어갔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교실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아이들의 책상 오른쪽 위에 붙어 있는 이름표에서 빛이 났다. 서른네 명의 이름표 여백에 지훈이가 꽃, 나비, 벌 등의 그림을 컬러로 그려 넣었던 것이다. 흰 바탕에 검은 명조체로 쓴 학번과 이름 옆에 지훈이가 그려 놓은 그림이 제법 어울렸다. 아이들이 좋아했다.
아이들은 너도 나도 지훈이의 그림을 받고 싶어 했다. 일학년 때 '짱'이었던 지금 이학년의 '짱'도 지훈이에게 그림을 요청했다. 구에서 주최하는 환경 미술대회에 지훈이의 작품을 출품했더니 얼마 안 가 떡하니 금상 소식이 들렸다. 아이들은 환호했고 지훈이도 한결 밝은 모습으로 집과 학교를 오갔다. 200장의 도화지가 다 소진된 것은 기말고사가 끝나고 여름방학을 기다리던 때였다. 지훈이의 통지표를 쓰면서 가정통신문란을 빼곡하게 채웠다.
- 그림 솜씨를 발휘하여 학급 아이들의 책상 이름표를 디자인해 주었으며 환경구성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교내 사생대회에서 수상은 물론이고, 구에서 실시한 환경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가정에서 칭찬해 주십시오. 미술 쪽으로 진로를 생각해도 좋을 만큼 소질이 엿보입니다. 지훈이와 진지하게 대화를 해 보시고 미술 선생님과도 상담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책을 많이 읽게 해 주세요. 사물을 보고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면 그림 그릴 때도 더 풍부한 상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학을 잘하는 아이들이 그림도 잘 그립니다. 공간을 보는 원리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2학기 때 시작되는 도형 공부에 좀 더 신경을 쓴다면 그림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담임이 수학 담당이라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