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기말고사 후 여름방학 전까지 십여 일은 교사들도 아이들도 오로지 방학 날 만을 기다리며 그저 견디는 시간이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장문의 가정통신문을 받아 본 지훈이 엄마가 전화를 했다.
- 선생님, 지훈이가요. 초등학교 5학년 때 귀를 앓았어요. 언젠가 갑자기 들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먹고사느라 바빠 치료 시기를 놓쳐 결국 한쪽 귀를 못 듣게 됐어요. 나중에 병원에 갔을 때 의사 선생님이 돌발성 난청은 제 때 바로 치료하면 되는 데 왜 방치했냐고 저를 막 혼내셨어요. 지금 나머지 한쪽도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고 하네요... 얘가 아주 어려서부터 집안의 온 벽과 바닥에 낙서를 하곤 했어요. 그게 재주가 될 줄도 모르고 많이 혼내주기도 했지요. 선생님이 써주신 글을 몇 번이나 읽어보았어요. 그거 읽고 많이 울었습니다.
지훈이 어머니는 수화기 저 너머에서 간헐적으로 흐느꼈다. 지훈이는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답답함을 그림으로 풀었던 것일까. 그저 습관일 수도, 아니면 절박한 외침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생각이 스쳤다. 지훈이 어머니는 전화가 조금 길어진다고 생각했는지
- 선생님, 제가 오늘 너무 말이 많았지요? 그동안 너무 자식을 챙기지 못하고 살았나 봐요. 선생님께서 그렇게 자세하게 지훈이를 관찰해 주시고 돌봐주셔서 저도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얘가 학교 가는 것을 즐거워한답니다... 방학이 왜 이리 기냐고 한다니까요...
- 예 예... 전 뭐 한 일도 없는데요. 그림에는 분명 소질이 있어 보이니 나중에 미술 선생님과 상담 한 번 해보시면 좋을 듯해요. 저에게는 그림이 순수하고 좋다고, 앞으로도 기대가 된다고 했거든요.
지훈이 어머니와 통화를 하고 난 후 내 중학교 시절을 다시 떠올렸다. 그때도 미술 선생님이 말했었지. 미술시간에 내가 그려 놓는 수채화를 보고 '너 인마, 그림 좋다'라고 했었다. 미술 선생님은 '너 인마, 특활반이 문예반이지? 미술반으로 옮겨. 내가 국어 선생님에게는 이야기해 둘게.' 말 끝마다 '너 인마'를 붙였던 미술 선생님은 그 후에도 몇 번 고흐의 화집을 보여주었다. 물론 문예반에서 미술반으로 옮겨 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림을 그리는 일은 없었지만 미술 선생님의 '너 인마, 그림 좋다'라는 말은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아이들은 한 뼘이나 더 자란 키로 나타났다. 그새 변성기를 맞은 놈도 있었고, 얼굴에 여드름을 가득 달고 나타난 아이도 있었다. 지훈이는 한결 명랑해졌다. 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아이들도 지훈이에게 무엇인가를 얘기할 때는 오른쪽 귀에 대고 또박또박 말을 했다. 지훈이는 교실 환경 구성을 도맡아 했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꾸몄다. 하루는 학급에 올라가니 출입문 위에 달아 놓은 학급 표식이 없어졌다. 지훈이가 어제 떼어 간 것이라 했다.
1교시 후에 발견된 학급 표식은 평범한 '2-1'이 아니었다. 2-1이라는 글자는 있었으되 그 주변에는 곰돌이 푸와 꿀단지가, 그리고 익살스러운 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2-1'은 정갈하게 코팅이 된 채 다시 출입문 위에 걸렸다. 교실은 점점 지훈이의 캔버스가 되어 갔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교실 환경 구성을 이리저리 바꾸어 놓았다. 공부 습관이 금방 들지는 않았다. 수학 시간에도 여전히 과제로 내 준 예제를 베끼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훈이는 분명하게 자기 의사를 표현하였다.
"선생님, 이 문제는 베끼다가 무엇을 물어보는지 알았어요. 선생님, 이 문제는 아무리 읽어봐도 뭘 물어보는지 모르겠어요."
그럴 때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문제가 묻는 내용을 쉽게 설명해 주었다.
"선생님, 정말 수학을 잘하면 그림도 잘 그릴 수 있어요? 거짓말 아니죠?"
"그래, 특히 2학기 때 배우는 도형 부분은 공간 감각을 늘리는데도 좋단다. 쉽게 설명해 줄 테니 한 번 같이 해 보자."
도형 공부를 할 땐 지훈이의 눈이 빛났다. 나는 삼각형, 사각형 등의 도형을 가르칠 때 개념 설명을 뒤로 미루고 종이와 자, 컴퍼스를 가지고 실습 위주로 수업을 진행했다. 삼각형의 닮음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색종이와 가위를 사용하여 무한히 자기 복제 모양을 만들어가는 프랙털을 실습하였다. 개념을 익히고 증명은 하지 못했지만 지훈이는 직관적으로 파고들었다. 공식이나 이론으로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그림으로 보았다.
바람은 서늘해졌고 가을이 깊어갔다. 교실 앞 화단의 단풍나무는 선명한 붉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때쯤 지훈이는 화단 쪽에서 자주 머물렀다. 지훈이는 나뭇잎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앞뒤로 넘겨가며 신기한 듯 보고 또 보았다. 나무의 줄기도 자세히 관찰하였다. 관찰하다가 손으로 만져보고 질감을 느꼈다. 그런 후에는 여지없이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림은 훨씬 좋아졌다. 지훈이의 그림은 교과 수업을 들어오는 교사들에게도 알려져서 자주 칭찬의 대상이 됐다.
과학을 가르치는 최 선생은 '그래, 요즘은 한 가지만 잘하면 돼. 그림 더 열심히 그려.'라고 했고, 이미영 선생도 자주 지훈이를 칭찬했다. '얘 지훈아, 그림 잘 그리려면 수학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것은 알지? 그림은 이야기야. 이야기는 국어시간에 다루지? 그러니까 국어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해.'라고 말했다. 지훈이는 모든 교사들의 이야기를 믿었다.
2학기의 시간은 짧았다. 기말고사가 끝나니 아이들은 겨울방학을 기다렸다. 지훈이의 성적이 썩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교과에서 고른 성적 향상이 있었다. 특히 미술은 실기와 이론을 합쳐 2학년 1반에서 유일하게 만점을 받았다. 전교에서 세 명이 받는 교과 우수상을 받았다. 진심으로 축하했다. 지훈이도 지훈이 어머니도 매우 기뻐했다. 겨울방학은 빠르게 지나갔다.
두어 번 지훈이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결 밝은 목소리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미술대학에 다니는 대학생이 지훈이의 그림을 봐준다고 했다. 지훈이가 요즘 엄마에게 말도 잘 걸고 명랑해져서 자기는 그게 더 좋다고 했다. 아빠 얼굴도 모르고 누나 손에 자란 아이라고 했다. 그 누나는 지금 지방에서 대학에 다닌다고 했다. 지훈이 엄마가 느끼는 행복감이 들뜬 목소리에 실려 전해졌다. 2월에는 졸업식, 종업식을 위해 며칠만 등교하면 됐다. 2학년이 끝나는 종업식날 반 아이들에게 말했다.
"자, 이제 우린 헤어진다. 일 년 동안 수고했고, 앞으로 찾아오지 마라."
"에이, 선생님 정말이요? 우리가 찾아가지 않으면 섭섭하실 텐데..."
"아니, 정말이다. 너희들은 3학년에 올라가 새로운 담임 선생님과 재미있게 지내라. 나는 너희 후배들 만나서 재미있게 놀 거다."
종업식이 끝나자 아이들은 삼삼오오 교실을 빠져나갔다. 가방을 둘러메고 신발주머니를 든 지훈이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지훈이도 공부하고 그림 그리느라 수고했다. 잘 가거라..."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간 교실이 고요했다. 서쪽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책상을 비스듬하게 비추었다. 지훈이가 도안한 서른네 개의 이름표가 햇빛을 받아 허공으로 떠오르는 듯했다. 사물함의 이름표에도 지훈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지훈이의 손이 간 환경 구성과 게시물, 학급 표식도 그대로였다. 지훈이는 교실을 떠났지만 녀석의 숨결은 교실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교실은 지훈이의 캔버스였고 지훈이의 세상이었다. 어쩌면 지훈이는 타고난 그림꾼이었는지도 모른다. 창밖에는 매운바람이 불었지만 가슴은 벅차올랐다.
다시 3월이 됐다. 거짓말처럼 봄기운이 교정 여기저기에서 꿈틀댔다. 나는 연구부장을 맡아 오랜만에 담임 업무를 손에서 놓았다. 사실은 자청한 보직이었다. 이 학교는 부장교사를 평교사들의 투표로 뽑는 전통이 있었다. 몇몇 교사들과 하고 있었던 책 읽기 모임을 확대하고 싶어서 자청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연구부장을 희망한 교사가 나 한 명뿐이라 교장은 임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구부의 3월은 매우 바빴다. 학교교육계획서 작성, 수업연구 계획, 연간 학부모회 활동 계획, 교과협의회 운영, 지구 연구부장 회의, 교원능력개발평가 계획 수립, 포상계획, 학습 준비물 배부 계획 등을 세우는 일이 숨 가쁘게 몰려왔다.
다섯 명의 부서 교사들과 함께 하나씩 처리해 갔다. 학교교육계획서를 작성할 때는 야근하는 날도 많았다. 3월 말에 있는 학부모 총회까지는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내가 맡은 수업과 동아리 활동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공부 모임에 참여할 교사들을 모집하니 모두 열두 명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한 달에 한 번 책을 읽고 토론하는 교원학습공동체였다. 바쁜 3월, 한숨 돌리는 4월이 지나갔고, 푸른 5월이 왔다.
스승의 날이었다. 언젠가부터 서로 불편하지 않기 위해 행사는 생략하고 오전 수업 후에 아이들을 하교시켰다. 오후에는 은사를 찾아뵈라는 명목의 단축 수업이었지만 아이들은 일찍 끝난 즐거움에 운동장 가득 웃음소리 남기고 교문을 빠져나갔다. 그래도 몇 년 전까지 스승의 날이 되면 아이들은 정성스럽게 쓴 손편지나 카드를 들고 왔었다. 몇 해 전 TV에서 학부모에게 선물을 받아 승용차의 트렁크에 싣는 교사의 모습을 찍어 보여주었다. 선물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았으나 TV는 교사들이 여전히 선물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 후 아이들과 교사, 가정과 학교의 관계는 한층 더 서먹해졌다.
교직 경력이 쌓일수록 아이들과 감정을 나누는 것이 피곤해졌다. 내가 맡은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그 시기가 끝나면 서로 깨끗하게 헤어지자는 내 말에 아이들은 실천으로 화답했다. 아이들은 진급하여 상급 학년으로 올라가거나, 졸업하여 학교를 떠난 뒤에 정말로 다시 찾지 않았다. 자청하여 그리된 일임에도 아주 가끔은 허전함이 몰려왔다. 옆 자리에서는 졸업생들이 몰려와 어색하게 웃고 있는 선생님과 사진을 찍었다. 점심시간이 임박했으므로 최 선생은 짜장면 값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런저런 합리화를 하면서도 허전한 마음을 안고 물끄러미 창가 쪽을 바라보고 있자니 작은 서글픔 같은 것이 몰려왔다.
- 내가 뭐 아이들이 찾아오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작은 카드라도 보내면 어디 덧나나? 아무리 내가 쿨한 헤어짐을 강조했기로서니 정말 문자 하나 보내는 놈이 없구나... 이제 누가 찾아오더라도 소용이 없다. 난 이미 학교 밖으로 나갔을 테니... 내가 나간 다음에 누가 찾아오면 존경하는 수학 선생이 없는 허전한 학교를 경험하겠군. 뭐 영화나 한 편 보는 것으로 스승의 날을 자축할 수밖에...
휴대폰에서는 졸업생들이 보내온 '샘 스승의 날 축하해요. 뵙고 싶어요~'라는 의례적 내용의 톡이 울렸다. 나는 책상 서랍을 닫고, 캐비닛을 닫고, 컴퓨터를 끄고, 책상 위 물건을 이리 놓았다 저리 놓았다 물색없이 정돈하였다. 혹시라도 내가 나간 직후에 누구라도 오면 어쩌지? 나답지 않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 5분만 더 있다가 나가야지 하다가도 '이거 내가 뭐 하는 짓이지'하는 마음이 교차하면서 '이제는 냉정하게 나갈 시간'이라고 오금을 박고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 쪽을 보았다. 지훈이가 그곳에 있었다.
"선생님, 퇴근하셨는 줄 알았어요. 저 막 뛰어 왔어요..."
지훈이 싱그럽게 웃으며 내 자리로 왔다. 3학년이 된 지훈이는 그새 키가 훌쩍 컸고, 변성기를 지난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사실 속으로는 많이 반가웠으나 표현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공부하느라 바쁜데 뭘 찾아오고 그러니. 난 사실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
"저기, 선생님께 드리려고 제가 만든 게 있어요... "
지훈이는 가방에서 책갈피 사이에 있는 카드를 꺼내어 나에게 주었다. 지훈이가 손수 만든 카드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하루 종일 걸렸을 것 같은 만듦새였다. 내가 전에 나누어 준 도화지를 오려 레이어 형태로 겹겹이 붙여서 만든 카네이션이 환하게 빛났다. 꽃과 이파리, 줄기를 정교하게 표현한, 너무 충분하게 훌륭한 작품이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아이들에게 받은 선물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스쳤다. 나는 겨우 '고맙다 지훈아'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목이 조금 메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지훈이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천천히 카드 뒷면을 보았다. 그곳에는 지훈이가 나에게 주는 한 줄의 글이 있었다. 별처럼 빛나는 문장이었다.
"선생님은 저를 최초로 인정해 주신 분입니다. 선생님, 사랑해요."
<지훈이의 캔버스> 끝
작가의 말
https://brunch.co.kr/@webtutor/8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