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실밖 Nov 11. 2024

작가의 말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에겐 살만한 세상이냐고'.

  연작소설을 표방했던 글의 최종화를 썼다. 전체적으로는 한 흐름이지만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생략된 부분이 있다. <춤을 추다>의 지수는 언젠가 모를 시점에 지훈이로 이름이 바뀌어 <지훈이의 캔버스>에 나온다. 지훈이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 돌발성 난청을 제때 치료하지 못하여 한쪽 귀의 청력을 상실한다. 귀는 어두웠지만 눈이 밝은 지훈이의 이야기를 연작소설 전체의 제목으로 삼았다. <지훈이의 캔버스>는 그렇게 정해졌다. 처음에는 작은 도화지였으나 이내 교실 전체가 지훈이의 캔버스였고, 결국 지훈이에게는 자기를 둘러싼 세상이 캔버스였다.

  <춤을 추다>에서 활기 넘치고 명랑했던 지영이의 친구 소라는 <소라의 겨울>에서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소라에게는 겨울'만 있다는 표현을 썼다. 독자들이 두어 대목에서는 읽기 힘들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늘 하는 말이 있다. '현실은 소설보다 가혹하다'는 말이 그것이다. <소라의 겨울>에 나오는 어른들은 누구랄 것 없이 성실하게 맡은 일을 하는 성인들이다. 그런데도 소라는 어른들에게서 절망을 거듭한다. 자기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과, 세상에 대한 따뜻한 관심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소라는 그것을 보았고, 어른들은 보지 못했다.

  <나는 네가 여기서 한 일을 알고 있다>의 시점은 우스개로 말하면 '삼인칭 무생물 독백 시점'이다. 20년 이상 교실 앞 벽에 붙어 있던 칠판에 생각하는 기능이 있어 기억하고 재현할 수 있다면 무엇을 보고, 기억하고, 말했을까 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전통적 칠판에서 최근 디지털 시대의 전자칠판에 이르기까지 교육의 변화를 맞는 교사들의 복잡한 심리를 칠판의 시점에서 그리고 싶었다. 눈썰미가 있는 독자는 알아챘겠지만 여기에 나오는 신지영 선생은 <춤을 추다>의 신지영이다. 다만, 과거 시점으로 돌아갔을 뿐.


  <시발 롤모델>의 그 녀석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황폐해지고 있는 교실 풍경을 그린다. 뉴스는 최근의 교실이 더 힘들어졌다고 말한다. 교사들은 아동학대의 잠재적 가해자처럼 여겨지면서 '가르치는 맛'을 잃어가고 있다. 부모들은 혹여 내 아이가 학교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걱정한다. 교사가 느껴야 할 효능감과 부모의 신뢰 사이, 그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기다림으로 희망을 만드는 긴 여정'임을 말하고 싶었다. 아주 작은 구원의 실마리라도 없다면 우리 교육은 정말 망할지도 모른다. 교사 독자들에게는 '아직 남아 있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고, 일반 독자들에게는 조금이나마 교실 상황을 이해하는 기회가 되길 바랐다. 그 녀석의 롤모델이 된 민 선생은 여러 에피소드에서 등장하는 사실상의 화자이다.

  각 에피소드는 독립적이되, 인물을 통하여 연결돼 있다. 한 인물의 젊은 시절과 중년 시절이 있고, 주요 등장인물인 아이들의 어린이와 사춘기, 청소년기와 성인기가 얽혀 있다. 어떤 이야기는 생략돼 있고, 특정 시점에서는 자세하게 묘사된다. 에피소드 사이의 생략된 이야기를 연결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각 에피스드의 시점은 통일하지 않았다. 작가가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 갈 때도 있고, 등장인물 중 누군가가 말할 때도 있다.

  나는 소설이란 '그럴듯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럴듯함(개연성)'이야 이야기의 필수 조건이지만, 인물과 현실을 어떻게 묘사할지는 전적으로 작가의 세계관 속에 있다. 우리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말한다. 소설의 드라마틱한 측면을 이르는 말이지만, 현실은 늘 소설보다 극적이며, 상상 저 너머에 있다. 모든 에피소드는 사실을 소재로 하여 창작의 과정을 거쳤다. 이야기 속에서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에겐 살만한 세상이냐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