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지원 Dec 03. 2021

결혼 10주년은 등산이지

용문산 가섭봉 2021년 11월 26일

아마도 나 같은 사람이 많겠지. 평소에 관심 없던 손세정제 같은 물품들을 쇼핑하면서 조용히 뻗어나가던 순방향이라고 느끼던 마음들에 균열과 틀어짐을 느낀 사람들 말이다.


산을 오르게 된 것은 코로나 때문이다.

트인 공간이 필요했고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은 없었고 2인 이상 만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자주 가던 공간들의 굳게 닫힌 문을 보면서 당연하게 누빌 수 있었지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자연에 대한 관심이 저절로 성장한 것 같다.


아니면 내가 지금 어디인지를 알 수 있는 GPS 기술 덕에 산을 오르게 되었을 수 있다.

길도 모르면서 평일 관악산 국기봉을 오르기 시작했다가 아무도 없는 길을 헤매기도 했고 이정표가 꼼꼼하게 붙어있지 않은 산을 다니며 내가 지금 올라가는 건가 내려가는 건가 의심하느라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던 산행을 몇 번 했다.

등산에 맛도 들이기 전에 소심해져 그만둘까 하던 차에 램블러라는 gps 프로그램을 깔았다.

그러고 난 뒤 내가 어디인지 매시간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이 앱과 배터리만 있다면 이름 들어본 어느 산이든 가볼 수 있게 되었다.

처음 가는 산길에 별다른 이정표나 앞서가는 사람이 없어도 쫄지 않게 된 것이다.

내가 내려가는지 올라가는지 얼마나 남았는지 어디쯤 왔는지를 아는 것은 안정감을 주더라.

인생도 그러면 참 좋겠다 가끔 생각한다.


그랬거나 저랬거나 나는 산을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산에 가는 날을 기다리다가 막상 산 앞에 서면 너무 많은 상상을 하다가 만나면 막상 뭘 할지 몰라 괜히 머리카락만 만졌던 중학교 시절 연애처럼 허둥대기 까지 하는데

그저 담담하게 오르면 되는데도 산을 오르기 전 큰소리로 기합을 넣거나 화장실에 뛰어들어가거나 다짜고짜 등산을 시작하기도 전에 초코바부터 까먹던지 하는 요란스러움으로 표현된다.




너무 많이 자거나 재미도 없는 넷플릭스 시리즈를 보다가 시간이 너무 가버리거나 원하지 않는 자리에 억지로 끌려가서 앉아있다 오는 일은 기분이 나쁘다.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시간낭비라는 소리인데

그런 사람 치고 주말 절반이 순삭 되는, 따지고 보면 제일 시간낭비 같은 등산을 매주 하고 있다.

아직은 혼산이 힘들어 동행인이 필요한데 산행 멤버들과 타이밍을 못 맞출 때 나의 수많은 시간낭비의 경험을 거의 함께 하는 남편이 이번에도 예외 없이 나에게 이끌려 함께 산에 다니고 있다.


며칠 전은 일상의 무게를 짊어지다가 어느덧 찾아온 주말이었고, 거기에다가 결혼 10주년이라는 거대 타이틀까지 있어버린 토요일 이었다.

우리 부부는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등산을 하는 건지 등산 계획을 짜고 보니 이번 주말이 결혼 10주년인 건지 사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아무래도 후자에 가까운 등산을 시작했다.


거국적 결혼 10주년에 간택된 산은 양평의 용문산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텅 빈 용문사 관광단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시작된 등산은

용문산... 이래서 욕문산?

십 년 동안 못한 욕... 여기서 하는 건가 싶을 때 정상에 도착! 이라고 쓰면 좋겠지만

욕을 두어 번 입 밖으로 하고도 한참 뒤에 정상에 도착했다.

너무 힘들었다. 모든 구간에 깔딱 고개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중간중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마주치던 무리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중도 하산하신 건지 남편과 자주 두리번거리며 내려왔다.


등산하는 동안 용문산 토요일인데도 이렇게 사람이 없어서 입장료 3천 원 언제 티끌들을 다 모아서 등산로를 관리하나 했는데 하산길 관광단지로 내려오니 산 밑의 용문사 주변에서 사진 찍고 산책하는 사람들로 산 밑은 북적였다.

괜한 걱정을 했네. 체중으로 힘든 내 무릎이나 걱정할걸.


인파를 뒤로하고 격한 운동 후에 느껴지는 특유의 죄책감 없는 기분으로 폭식할 식당을 찾는다.

아마도 등산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이거할려고 등산하는 것일수도 있다.

사실 아무 식당에서라도 최대의 만족감을 줄텐데 무얼 망설였는지 모르겠는 시간을 보내고 산 밑에 자리한 첫 번째 식당 옆 식당에 자리를 잡았고 등산 소울푸드인 제육쌈밥과 감자전이 앞 다투어 나의 장기 속으로 쳐들어갔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향한다.

용문산 관광단지 인근 온천이 있는 호텔을 대강 검색해서 며칠 전에 급하게 예약해두었다.

쉐르빌온천호텔 이라는 곳, 이름만 호텔이지 모텔이겠거니 하고 등산객에 관광객스러운 행색이나 표정만은 무심함을 유지하며 호텔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예상외로 거창한 외관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리스 건축양식을 흉내 낸듯한 전면부가 도로를 향해있었고 건물의 뒷면은 남한강에서 흘러들어온 강줄기에 면해 있었다.

체크인을 하러 로비에 들어서자 높은 천정과 크리스마스트리가 아기자기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카운터를 감싸는 자연석의 거친 돌들을 손등으로 진짜 돌인가 더듬으면서 체크인을 하고 긴 통로에 달린 꽃 모양의 벽부등들을 두리번거리면서 객실로 향했다.

쉐르빌 온천호텔은 어설픈 레트로가 아니라 오래 묵은 고고한 디테일들이 있는 호텔이었다.

객실 내부에 좌식 테이블과 등받이가 달린 좌식의자, 생수병이 아니라 정수기가 있었다.


목적은 온천이라 지하 온천으로 향했다.

온천텔이라는 제목 치고는 그냥 정말 오래된듯한 동네 목욕탕이었다.

숙박객보다는 지역의 목욕 마니아들이 모여있는듯한 탈의실로 낡은 장판지를 밟으며 목욕권을 바구니에 넣고 입장하였다.

촘촘하게 들어선 옷 장중 나의 번호 33번을 찾고 세탁을 많이 당해서 기운이 하나도 없는 수건 두 장 중 한장은 옷장 안에 넣고, 한장은 손에 들고 일회용 샴푸를 사려고 목욕탕 내에 매점을 향했다.

이것저것 일회용품들을 집고, 음료수도 한잔 사야겠다 싶어 냉장고를 보았는데 삼각 봉지커피우유를 발견했다.

대박… 정말 좋아한다 목욕탕에서 먹는 삼각모양 봉지 우유…

망설임 없이 집어 들고 아무래도 너무 완벽한 거 아닌가 감탄하며 목욕장에 들어섰다.


과거로 통하는 문을 열었나 싶게 7살 때 보았던 장면이 시간이 멈춘 듯 내 눈앞에 펼쳐졌다.

뽀얀 수증기 사이로 각자 자기만의 세계에 열중해 있는 사람들 궁서체로 바가지탕 열탕 안마탕을 적은 글씨가 코팅되어 목욕탕 벽에 붙어있고 아이보리색 세숫대야가 겹쳐있고 치약은 누가 가져갈까 입구 근처에 고무줄로 묶어놓은...

이런 곳이라면 살면서 한 번도 세신사에게 몸을 맡겨본적 없지만 한번 도전해볼까 생각이 들 정도의 푸근하고 친근한 느낌이 드는 그런 목욕장이었다.

그래도 객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남편을 생각하며 세신은 참았다.

(세신은 언젠가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


깨끗이 샤워를 하고 세차게 쏟아지는 입식 샤워기 물에 머리를 감고 나만 들리는 작은 감탄사를 내며 안식을 느낀다.

종아리를 조물조물하며 안마탕에 앉아 있으며 극락을 누리다 손이 쪼글쪼글해지기 직전에 탕에서 나온다.  

드라이로 머리를 대충 말리고 호텔 1층 편의점에 들러 대용량 맥주네캔을 사서 객실로 올라갔다.


객실에는 이미 스피드 하게 목욕을 즐긴 남편이 텔레비전을 보며 편안하게 누워있었다.

저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오늘은 성공적이군. 생각했다.

제육쌈밥 먹은 것이 아직 소화 진행 중이지만 텔레비전 옆으로 룸서비스 메뉴판을 발견하고는 나름 호텔이군.. 룸서비스도 있고 말이야?라고 아주 자연스럽고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순살치킨을 주문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뭔가 향수를 자극하는 텁텁한 튀김옷의 치킨과 번개모양으로 썰려있는 냉동감자와 케첩 머스터드 담긴 접시가 랩으로 덮여왔다.

서비스로 따뜻한 아메리카노(이 밤중에?)까지 찾아왔다.




결혼식을 하고 딱 10년이 지난 저녁이었다.

지금 우리가 올라가는중인지 내려가는중인지 한창인지 끝나가는 중인지 사는 건 등산 앱 같지 않아 지금의 내 위치를 알 수 없어서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적당히 무심하고 적당히 즐거워하며 사는 중이다.

아무튼 양평의 이 생뚱맞은 장소에서 비스듬히 침대에 누워 순살치킨을 먹고 무엇이든 물어보살을 보면서 출연자들 사연에 침을튀기며 훈수를 두고 남의 일에 과몰입하면서 토론하며 시간이 흐르고  점점 피곤해져 오는 몸을 침대에 누이고 우리는 잠시나마 우리가 오고 싶었던 곳에 정확히 도착한 느낌을 함께 느꼈다.



용문산 가섭봉 정상
용문산 하산 완료
이전 13화 고소공포증, 귀신이 고칼로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