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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원 Apr 25. 2022

인간 산 측정기

최애산을 고르는 일


아무 산도 오르지 않은 주말에 한 생각

배설의 쾌감처럼 글을 한바탕 쓰고 난 뒤의 쾌감이 있다. 그 쾌감은 답답했던 마음을 말로 풀어놓는 쾌감보다는 약간 더 고퀄리티의 쾌감이다. 아마도 브런치에 글을 쓰는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난 뒤의 만족감 때문에 황금 같은 주말에 노트북 앞에 앉아 이런저런 글을 쓰고 있을 거다.

신속한 업무처리를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회신과 요청 이메일을 연속적으로 쓰다 보면 내가 읽고 싶은 글을 쓰는 일이 그립다. 그리움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노트북 앞에 내가 앉아있을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 현실로 인해 더 깊어진다.

강동에서 강서로 서울을 가로지르며 출근하는 9호선 급행 지하철에서 수많은 오타와 검수되지 않은 문장을 블로그에 와다다다 살포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때도 있지만 오늘은 이 글을 쓰기 위해 책상의 지우개 가루들을 쓸고 물티슈로 책상을 닦고 시원한 음료수를 컵받침까지 받쳐놓고 책상에 바른 자세로 앉았다.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를 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나의 최애산이 어떤 산인지 발표하는 일. (현재 기준)

내가 제일 좋아했던 산은 어디였지 누구랑 갔었지를 생각하며 등산 어플을 뒤적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둠칫 둠칫 뛴다.   


최애산의 선정기준

고도 700미터 거리 10킬로미터처럼 수치로 규정되는 물리적이고 단순한 경험을 통해 그 수치들을 몸에 기억시킨다.

그 수치들을 경험하고 나면 물리적 척도가 아닌 또 다른 것이 내재화된다.

동행인, 시작하기 전의 망설임, 등산하는 중의 빡침 횟수, 화장실의 유무, 그날의 날씨, 오르면서 떠오른 생각 등이 영향을 끼치는데

정상에는 도달하고 싶으면서 오르는 걸음들이 무거운 날도 있고 그저 묵묵하게 오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날도 있다. 주요 영향 요소에 따라 기준이 다르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오늘 참 좋았어.

몇 주 동안 생각났어.

내일이라도 한번 더 오르고 싶어.

 

신체와 정신을 아우르는 등산의 정도를 따지는 단위는 와인의 맛만큼 정돈하기가 난이도가 높아 아무튼 이 시상식은 매우 복잡하다.   

 


심사위원(나)의 적합성

등산을 매주 다니면서 스스로가 산을 측정하는 기계가 되어가고 있다.

아직 100대 명산 2회차예요 이런 멘트를 하는 등산 고인물은 아니고 몇 월에는 무슨 산 정도 떠올릴 수 있는 글로 배운 산 + 꾸준한 주말 등산 어느덧 1년 차라 나름 프레시한 인재라고 생각한다.

 

심사위원인 나는 등산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 산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에 그쳤으나

최애산을 고르기 위해 지나온 산들의 리스트를 보면서 내 능력치가 어느 산의 이름을 아는 것,

어느 산이 어디에 있는지 인지하는 것을 넘어섬을 느꼈다.

등산을 자주 할수록 직접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풍경이 많아졌다고 할수있는데

예전에는 산은 멀리서 보면 삼각형이고 가까이서 보면 그냥 숲이구나 였으나 일상생활을 살면서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포토샵으로 만든 색깔처럼 파란 하늘일 때 어디쯤 어느 산의 어떤 길에 사람들이 땀을 흘리며 걷고 있거나 쓸쓸하게 비를 맞고 있는 것을 떠올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이 시상식은 꽤 권위 있다.

 

그래서 도대체 최애 산은 어디냐고  

아직도 못 정했냐고 물어본다면 이렇게 뜸 들이는 건 30년 전 미스코리아 시상식 어그로 같으니 최애 산은 먼지산(먼저 지나가세요 산악회) 멤버 문주와 함께 금요일 퇴근해서 여의도 증권가를 벗어나 밤의 도로를 느릿느릿 달려 낡고 널찍한 펜션에서 하루 자고 나서 말도 안나 오게 좋은 날씨 속에 묵묵히(아니다 많이 떠들어서 목이 아팠던 것도 같고.) 올랐던 월악산이라고 발표해버린다. 나무도 없고 눈도 없는 3월에도 능선의 역동적 라인과 푸른 충주호를 등산 내내 보여주며 지치지 않게 해 준 월악산.


여기서 고백할 것은 등산을 하지 않은 주말이라고 서두에 말했지만 사실 이번 주말에도 등산을 안 한 건 아니다 . 다만 오로지 산을 바라보고 산에 대한 궁금증으로 오르는 등산이 아니라 최근 몇 주간은 산이 처음인 사람들을 배려하는 산행을 해서 최애산이 그리웠나 보다.


다시 9호선이다

내가 월악산이 최애라고 말해버려 다른 산이 서운해하거나 산을 가보지 않은 사람이 너무 큰 기대를 하면 어떡하지 하며 하.. 혼자 미안하고 부끄러워하고 있다. 아 회사 거의 다 왔네? 이제 내려야지 우는 거 아니야 하품 때문에 나온 눈물이라니까.


덜컥 최애산을 정해 버린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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