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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원 May 04. 2023

양평 이층 집

2016년, 먹고 자는 것에 관심 없이 사는 곳만 만들겠다던 건축인

가성비를 따지는 습관을 인생전체에 대입해 보니 일 인분의 삶을 같은 장소에서 반복하며 사는 것이 아까웠다.

여러 장소에 살아볼 수 있으면 삶에 대해 더 여러 지식을 갖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즐겨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인생의 순간들을 이야기할 때 종종 물을 활용하여 단물, 쓴물, 물먹었다, 고인 물(이건 아닌 듯...)등을 사용한다. 여러 장소의 경험을 바란다고 했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 젊을 때 인생의 단물을 더 빨아보고 싶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건축설계 한답시고 우쭐하던 젊은 날들은 저물고 설계하며 야근을 많이해서 무기력해진 몸뚱아리만 남은 느낌이었다. 공간을 만들며 남의 쾌적한 일상을 세팅해 주고 관람하는 사람이 아닌 주인공이고 싶었다.

패배자 승리자 그렇게 보임 그렇게 안보임의 사사분면

누구도 질병에 걸리거나 가난해지기는 싫어한다. 그렇게 되어도 남을 의식하여 아닌 척을 할 수도 있다. 는 전제하에 이런 사분면을 만들었다.

1. 패배자 - 패배자처럼 보임  

2. 패배자 - 패배자처럼 안보임

3. 승자-승자처럼 안보임

4. 승자 - 승자처럼 보임

이런 사사분면이 있다면 적어도 1 사분면에는 속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겸허라는 단어가 체화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즐거워, 아니지 즐거워 보여야지 2 사분면으로 가자… 하고 2 사분면 쪽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매일 야근하던 설계사무소를 그만두었다.


운전 연습을 시작했다.

 종새를 태우고 남양주를 거쳐 양평까지 한적한 도로로 차를 몰고 다녔다. 종새는 늘 디에스엘알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좋아하는 사진 촬영을 했고, 나는 쉬지 않고 써갈기던 블로그 덕에 남양주와 양평 지역의 식당에서 양질의 공짜밥을 걱정 없이 먹으러 다녔다. 슬슬 남양주와 양평의 지리가 손안에 들어왔다.

도시와 현대건축을 추앙하던 내 눈에는 도시밖의 촌락지역은 초록색 덩어리로 읽혔다. 시골길을 후비고 돌아다니는 시간이 쌓이니 언덕 위에 있는 시골, 농업 종사자가 많아 보이는 시골, 외지인이 많이 유입된 거 같은 시골, 가축이 많은 시골등으로 각 마을들의 개성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완만한 산세에 따라 평화로워 보이기도 하고 비어있는 듯한 건물과 키가큰 풀들로 뒤덮여 있는 빈땅들이 척박해 보이기도 하는 것이 시골 풍경 취향과 선호하는 동네가 생기기 시작했다. 때마침 운명처럼 '월든'이라는 책이 나에게 찾아와 시골살이 욕구의 자양분이 되었다.


시골에 살아보자.

젊을 때 내 몸에 맞는 게 무엇인지 테스트해 보고 실패도 젊을 때 해봐야 한다는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는 논리에 탑승했다. 그나저나 젊을 때 왜 실패해도 괜찮은 건가 생각해 봤는데 늙어서 실패하면 1사분면(패배자 - 나이들어서 더 패배자처럼 보임)에 바로 속해 버리기 때문에 젊어서 실패해봐야 한다는 말이 나온 건가 보다.

실패했어도 나이라도 젊다 >> 2 사분면 >> 실패자라도 젊어서 패배자처럼 안보임

(실패와 성공 사사분면은 스스로를 설득하기에 꽤 쓸만하다.)

또 한편으로 종새가 그 당시에 서울은 공기가 너무 안 좋아서 숨 쉴 때마다 답답하다고 종종 말했다. 나는 '도시의 공기가 나를 자유롭게 한다.'(그 공기가 그 공기를 말하는 건 아니지만)를 인용하여 방어했어야 했는데 가족의 50%를 맡고 있는 종새가 힘들지 않은 것이 중요했다.

2인가족에서 1명이 안 괜찮으면 우리 가족 과반수 이상이 안 괜찮은 거니까.


나의 운전 연습 종착지는 블로그체험단에서 부동산방문으로 바뀌었다. 2016년에도 이미 서울은 네이버부동산에 매물들이 다 공개되어 있어 개별부동산을 돌아볼 필요가 없지만 시골은 부동산별로 보유한 매물들이 달랐다. 그래서 시세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 아파트처럼 규모가 획일적이지도 않았다. 공인중개사란 어떤 사람들인가. 파는 사람에게는 비싸게 파는 것이라고 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싸게 사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 아닌가. 그런 사람들에게 순진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 등기부등본, 건축물대장, 지상권, 전세권, 도로점용, 개발행위허가 같은 설계 하면서 주워들은 용어들을 자주 인용했다. 집장사들의 집을 구경했다. (*집장사는 1900년대초 그 당시는 생경했던 한옥을 지은다음 파는 방식을 시도하는 집장수 에서 이어진 말 같다. 이제는 설계를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고 디자인적 질서나 공간의 풍요로움보다는 공사비 최저가와 최대면적을 필두로 공사를 하는 사람들을 주로 말한다. 사실 지어놓은집을 사는 사람외에 맞춤으로 집을 짓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다.) 집장사라는 말에 약간의 부정적인 느낌이 있긴하지만 알고 보면 대형건설사가 만든 아파트 외에 우리가 사는 대부분의 집을 만드는 사람들이고 내가 아파트에 살지 않았던 모든 날들이 집장사의 집에서 살았던 날들이다.

집장사의 집 짓는 방식은 건축교육과의 괴리가 있기에 현재의 건축사무소에서 설계하면서 만나기 어려운 작은 요소들을 집장사들의 호연지기(예를 들면 아르누보 난간스타일과 안도다다오 노출콘크리트의 만남, 거실의 강렬한 포인트월, 우물천장과 샹들리에, 하이그로시 붙박이 가구, 벽돌조에 샌드위치 창고 덧붙이기 등)라 칭하며 그런 요소들이 불쑥불쑥 나타날 때마다 감탄했다. 아파트왕국인 서울에서  84포베이 59쓰리베이 만 실컷 보며 살아서 창의력이 부족한 나에게는 집장사의 집이건, 건축가의 집이건, 단독주택을 구경하는 일은 신나는 일이었다.

다만 몇 년 사이 대형건축물만 설계했던 나에 비해 조금 더 작은 공간을 설계하는 경험이 많았던 종새는 1분만 훑어봐도 그 집의 치명적인 단점을 찾아냈다. 층고가 높은데 다락창이 고정창이라 더운 공기가 위로 배출이 안된다던지, 일반 세탁기가 들어가는 사이즈보다 몇 센티가 부족해서 이 집에 오면 세탁기를 바꿔야 한다는 눈썰미를 발휘해 동행하는 공인중개사와 나를 간간히 놀라게 했다. 이러다 아무계약도 안할 것 같다고 생각한 나는 '이 정도면 매우 아름답군…' 하며 휘뚜루마뚜루 계약을 진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섬세한 사람기준에 맞추는것이 퀄리티를 올리는 일이라 생각하며 인내를 가졌다. 힘들어하는 공인중개사들을 위해 익살스러운 말투로 "우리 바깥분께서 가진 재산대비 눈이 많이 높아요"라는 농담을 하며 웃음을 빵빵 터트려드리며 뿌듯해 했다.


매매부터 월세까지 알아보았다. 대출을 받아서 덜컥 전원주택 자가를 갖출 깡은 부족했다. 수많은 필터링 끝에 우리가 고른 집은 마치 전원도시에 잘못 들어선 2층짜리 아파트 같은 집이 있었다. 1층은 근린생활시설의 일반음식점으로 공실이었고 2층은 방 4개, 화장실 2개인 으리으리한 신축 주택이었다. 법정 용적률상 3층까지 더 지을 수 있는데도 2층까지만 지은 집이었다.



아이언맨 2편의 토니스타크는 깎아지른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끼워져 있는 건물에 살고 있다. 아이언맨에게는 직주근접이나 대중교통이 필요 없어서 최첨단의 시설의 집을 대자연의 한가운데 콕 끼워 놓은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엄청난 재력과 공간을 쉽게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의 집이라면 저런 집이 적당하다 생각했었다. 놀랍게도 양평 이층 집에 그런 면이 있었다. 자연 안에 생뚱맞게 들어선 콘크리트 덩어리, 거기에 생활감이 한 톨도 없는 반듯한 신축이라는 것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집 찾기의 시작은 월든의 오두막 아니었던가...?) 양평 이층 집은 40~50 가구 남짓한 집들을 뒤로하고 마을 초입에 차렷자세로 서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바닥은 아스콘 포장이 되어있고 넓은 주차장이 있었다. 짙은 갈색 SUV와 스쿠터 한대를 세워놓으니 우리 집 같았다.



전에 살던 구의동집에 비하면 모든 것이 너무도 넓었다.

이사 가기 전 집에 방문에 실측을 하고 도면을 그리고 기존 가구와 구매할 가구들을 미리 배치해 두었다.



거실과 주방을 가르는 장식벽

거실과 주방을 가르는 장식벽

개별공간을 언급하기에 앞서 이 집을 보고 제일 의문이 들었던 것이 이 장식벽이다.

이 장식벽은 왜 있는거지

설계자도 공간이 너무 커서 어찌할 바 모르고 중간에 괜히 파티션을 집어넣은 걸까

3000, 4500 비율로 거실과 주방을 나누고 있는 장식벽이 아쉬웠다.

모든 건축가는 자신의 원형이 있다고 한다.

평면을 계획하다 보면 자신이 어린 시절 살던 집의 평면과 비슷해진다던가 어떤 본인이 생각하는 오리지널폼의 결과가 나와야 완성되는 느낌을 갖는다고 한다.

나로 예를 들자면 주거 평면을 설계하다 보면 단독주택임에도 84 아파트처럼 평면이 나와야 마무리가 되는 느낌이 든다. 건축가들은 자신이 살아온 집이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건축의식 속에 원형으로 자리 잡고 평면을 고치고 고치다 보면 그 원형을 틀삼은 평면으로 회귀하게 된다고 하는데 이 집을 설계한 사람은 아무래도 이렇게 집안에 대공간이 벽으로 나뉘지 않는 것은 그냥 둘 수 없었던 것 같다. 벽 선반의 마감이나 칸의 구성이 거슬린것도 있지만 볼때마다 납득이 되지않는  디자인이라 (공사비를 써가면서? 구조벽도 아닌데? 예쁘지도 않은데...? 기능적이지도 않잖아?) 커튼으로 가리고 살았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설거지가 정면으로 보이는 구조였던 이유도 있다. 왼쪽 편은 르꼬르뷔제의 포스터를 폼보드에 붙여두었다.

커튼으로 가림




거실

거실

이케아에서 8명이 넉넉하게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을 구매했다. 평소에는 남편과 내가 각자의 노트북과 서브 모니터를 올려놓고 작업했다. 나는 블로그를 쓰고 남편은 의뢰받은 건축설계 일을 했다. 회사를 그만두면 개인 프로젝트가 많이 생길 줄 알았는데 남편만 그랬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개인적인 프로젝트가 하나도 안 생겨서 혼자 공모전을 하거나 건축사 시험공부를 했다.

거실

한 명이 딱 눕기 좋은 침대처럼 생긴 소파에 종새와 자리싸움을 하다 뒤엉킨 상태로 정지해서 텔레비전을 봤다. 몸의 어디 한부분이 저릴 때까지 그 자세로 있었다. 아래층 근생은 계속 비어있어서 층간소음걱정은 커녕 집에서 장구랑 꽹과리를 광광쳐도 될 정도로 집간의 거리도 멀고 주변에 아무도 안 사는 느낌이었다. 아침마다 방방 뛰며 새천년 건강체조를 하고 집에서 노래를 부르려고 블루투스 마이크를 샀다.




주방 옆 작업공간

주방 옆 작업공간

매일 새소리만 들렸다.

새소리는 소음이 아니어서 필요 이상으로 고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방문을 닫고 어딘가로 들어가면 고요함이 한도초과가 될 거 같아 모든 것을 거실에서 했다. 주방옆에 넉넉한 폭의 공간이 있어서 작업공간을 만들었다. 꿀 같은 시간을 더 꾸덕꾸덕하게 만들고 싶어 가죽공예를 배웠고 햇살이 잘 드는 자리에 출근하듯이 몇주 연속 눈을 뜨자마자 찾아가서 베지터블 가죽에 망치질과 바느질을 했다.




건축사 시험준비 존

건축사 시험준비 존
건축사 시험준비 존

공간도 남고 책상이 남아서 거실로 꺼내 제도판을 설치해 건축사 시험공부를 했다.




다용도룸-주방2

다용도룸-주방2

요리도 많이 하게 되어 김치냉장고를 샀다.




침실

구의동에 살 때는 벽 쪽에 붙어 자다가 화장실이라도 가려면 누군가를 조심히 넘어가야 했다. 아무리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의 시몬스 침대라고 해도 종새는 잠을 깼다. 구의동에 살동안 나의 소원은 통로, 침대 양측의 통로확보였다. 양평이층 살면서 통로를 얻었다.

침대를 두고도 운동장 같은 침실





테라스

누구라도 우리 집에 오면 테라스를 보며 환호했다. 테라스에 소파를 내놓고 날씨가 좋으면 논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옥상

집의 평수 그대로 집의 머리 위에 반듯한 옥상이 있었다. 거대옥상에서 우리는 불꽃놀이를 하고 셔터스피드를 잔뜩 느리게 해서 불꽃으로 글씨를 만들었다. 시골에 오면 다들 마음이 따뜻해지는지 대부분 4명이서 짝을 지어 LOVE를 만들었다. 기분이 울적한 날이었는데 종새는 코튼볼을 잔뜩 달아놓고 그 한가운데 치킨 한 마리를 두고 옥상에서 나를 불렀다. 나는 우주의 중심에서 닭 뜯는 느낌이라 신난다고 말했다. 과거 함께 야근하던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낮에는 옥상에서 병맥주를 마시고 저녁에는 거실의 큰 테이블에서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웨버그릴을 사서 꼬치를 잔뜩 만들어놓고 남편의 직장동료 열댓 명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파티를 했다.




손님방

방이 4개, 집에 사는 사람은 두 명이고 문 닫고 방에 들어가기 싫어 매우 큰 거실에서 주로 상주하다 보니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방이 있었다. 이 시기에 세간살이들이 한계를 못 느끼고 늘어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비어있는 이방을 손님방이라 하였다. 응당 펜션이라면 손님방이 있어야지, 손님용 이불을 구비해 두었다.




호스트

파티가 흔했다

좋은 일도 축하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대부분의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 같다

전원생활을 해서 당연 축하할 일이 많은 것은 아니다 한강에 가면 치킨을 먹고 싶듯 공간이 저절로 만드는 이벤트다.

나는 이런 기분이 자주 들곤 했는데

다 같이 펜션으로 놀러 갔다가 바비큐를 하고 불꽃놀이를 하고 노래방기계로 노래를 부르고 난 내일 출근해야 돼서 이만 - 하며 하나둘씩 떠나고 그럼 나도 이제 가야지 하고 짐을 챙기려는데 펜션에 짐을 너무 많이 싸왔다.

책상도 싸 오고 침대도 싸왔다.

어라.. 여기가 내 집이네 나 지금 펜션에 살고 있는 건가?

딱히 축하할 일도 없는데 나는 왜 그리 호스트 역할을 했는지 큰 공간을 점유하고 있으니 사람으로 채워야 할 것 만 같고 그런 시간들이 적립되는 것이 뿌듯했다. 이 당시 가족모임 장소로 우리 집을 활용했다. 엄마의 환갑잔치에는 조카들이 마이크로 노래를 부르고 아버지가 어머니께 편지를 낭독하고 어머니에게 꽃머리띠를 만들어 드렸다. 사람들에게 생활을 공유하고 넉넉하게 보이며 살았다.



주말마다 서울의 교회에 갔다.

평일에는 남편이 성수동으로 차를 끌고 출근을 했다. 차가 한 대밖에 없어서 남편이 차를 끌고 가면 나는 아무 데도 가지 못했기에 양수역으로 종새를 데려다주고 돌아왔다. 양수역에서 경의중앙선을 타고 경기도민의 설움을 느낄 종새가 안쓰러웠다. 그건 1 사분면에 속해있는 사람 같았다. 많이 멀긴 멀었다. 회사까지 40킬로 가까이 되었으니 말이다.


놀만큼 놀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다시 설계를 하고 싶었다. 나는 꽤 뾰족했는지 조직의 어느 포지션에 갖다 놓아야만 빛나는 사람이었다. 스스로도 빛나는 줄 알았는데 혼자서 시작과 끝을 만들어내는 추진력과 절박함은 부족했다. 소속감을 느끼고 매일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어디론가 가고 싶어 논현동에 있는 어느 공간디자인 회사로 장거리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갑자기 담배연기가 왜 여기서 나와…

1년 넘게 공실로 있던 1층 카페에 결국 집주인 분이 카페를 차리셨다. 평일에는 안타깝게도 손님이 두 팀정도 왔다. 주말에는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들렀는데 도시사람의 부류 중

카페 문 앞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 중

인적 드문 시골이면 아무 데서나 담배 피우고 침 뱉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그 카페에 온 것 같았다. 누군가의 sns계정에 그런 글이 있나 찾아봐야 하나 싶었다.

‘여기 커피 마시고 바로 나와서 담배 피우기 좋은 카페 있음’이라고

날씨가 좋아도 창문을 닫고 살기 시작했다.


숨어있던 용적률을 왜 갑자기 찾아...

우리의 옥상 엄밀히 말하면 집주인이 용적률을 다 채우지 않아 미완성이었던 3층 바닥슬라브다. 한층 더 지을 수 있던 이 집의 마지막 남은 용적률이 채워졌다. 3층 지붕까지 지어졌다. 샌드위치 패널로 속전속결의 집이 생겼다. 저 멀리서 2층이었는데요 3층입이었습니다? 어리둥절하며 집을 바라보며 걸어오며 보고 있는데 사실 뭔가 다 그리지 않았던 그림이 다 완결된 느낌을 받았다.

근데 다지으니까 건물은 좀 보기가 괜찮네? 하고 웃기는 웃었다. 남편과 나는 다시 부동산에 갔다.

카페의 손님들, 위층에 집주인이 들어와 살기 시작해 더 이상 같은 퀄리티의 전원생활은 힘들 거 같아서 이사를 하기로 했다. 2년의 계약기간이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먹고 자는 것에 관심 없이 사는 곳만 만들겠다는 것은 그릇만 만들겠다는 얘기잖아? 그러니까 나는 부엌일을 안 하는 건축가 따위 신용하지 않아. 부엌일, 빨래, 청소를 하지 않는 건축가에게 적어도 내가 살 집을 설계해 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어." -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먹고 자고 사는 어렴풋했던 감각을 양평에 산 뒤로 계속 이어갔다.

구의동에 살 때는 자는일만하기 위한 집생활을 했다면 양평 이층 집에서는 건축법의 거실의 요건(“거실”이란 건축물 안에서 거주, 집무, 작업, 집회, 오락, 그 밖에 이와 유사한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는 방을 말한다.-건축법 제2조 1항 6호)에 나오는 많은 활동을 한 것 같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고 공간의 구획이 많아짐에 따라 집에서 할 수 있는 행위가 늘어나고 기억의 지점이 늘어나고 장면으로 남아 삶이 풍요로워지는 걸 느꼈다.

내가 음식을 해 먹고 집안일을 해서 스스로를 먹여 살리는 경험, 그저 나는 회사일 아니면 아무것도 못해를 무심하게 말해버리는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집안일을 해보지 않고 주택을 설계해 온 것도 과연 제대로 된 설계였는지 뒷골이 서늘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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