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먹고 자는 것에 관심 없이 사는 곳만 만들겠다던 건축인
가성비를 따지는 습관을 인생전체에 대입해 보니 일 인분의 삶을 같은 장소에서 반복하며 사는 것이 아까웠다.
여러 장소에 살아볼 수 있으면 삶에 대해 더 다양한 지식을 갖게 되지 않을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젊을 때 인생의 달콤하고 나태한 경험을 베짱이처럼 해보고 싶기도 했다.
건축설계를 하면서 자의식을 성장시켰던 열정 넘친 주니어 시절은 지나가고 야근을 많이 해서 무기력해진 몸뚱이만 남은 느낌이었다. 공간을 만들며 남의 쾌적한 일상을 세팅해 주고 관람하는 사람이 아닌 주인공이고 싶었다. 매일 야근하던 설계사무소를 그만두었다.
운전 연습을 시작했다.
종새를 태우고 남양주를 거쳐 양평까지 한적한 도로로 차를 몰고 다녔다. 종새는 늘 디에스엘알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좋아하는 사진 촬영을 했고 나는 쉬지 않고 써 갈기던 블로그 덕에 남양주와 양평 지역의 식당에서 양질의 공짜밥을 먹으러 다녔다. 슬슬 남양주와 양평의 지리가 손안에 들어왔다.
도시와 현대건축을 추앙하던 내 눈에는 도시밖 촌락지역은 초록색 덩어리로 읽힐 뿐이었는데 시골길을 후비고 돌아다니는 시간이 쌓이니 점차 언덕 위에 있는 시골, 농업 종사자가 많아 보이는 시골, 외지인이 많이 유입된 거 같은 시골, 가축이 많은 시골등으로 각 마을들의 개성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완만한 산세에 따라 평화로워 보이기도 하고 비어있는 듯한 건물과 키가 큰 풀들로 뒤덮여 있는 빈땅들이 척박해 보이기도 하는 것이 시골 풍경 취향과 선호하는 동네가 생기기 시작했다. 때마침 운명처럼 '월든'이라는 책이 나에게 찾아와 시골살이 욕구의 자양분이 되었다.
시골에 살아보자.
젊을 때 내 몸에 맞는 게 무엇인지 테스트해 보고 실패도 젊을 때 해봐야 한다는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는 논리에 탑승했다. 또 한편으로 종새가 그 당시에 서울은 공기가 너무 안 좋아서 숨 쉴 때마다 답답하다고 종종 말했다. 나는 '도시의 공기가 나를 자유롭게 한다.'(그 공기가 그 공기를 말하는 건 아니지만)를 인용하여 방어했어야 했는데 가족의 50%를 맡고 있는 종새가 힘들지 않은 것이 중요했다.
2인 가족에서 1명이 안 괜찮으면 우리 가족 과반수 이상이 안 괜찮은 거니까.
나의 운전 연습 종착지는 블로그체험단에서 부동산방문으로 바뀌었다. 2016년에도 이미 서울은 네이버부동산에 매물들이 다 공개되어 있어 개별부동산을 돌아볼 필요가 없지만 시골은 부동산별로 보유한 매물들이 달랐다. 그래서 시세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 아파트처럼 규모가 획일적이지도 않았다. 공인중개사란 어떤 사람들인가. 파는 사람에게는 비싸게 파는 것이라고 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싸게 사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 아닌가. 그런 사람들에게 순진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 등기부등본, 건축물대장, 지상권, 전세권, 도로점용, 개발행위허가 같은 설계 하면서 주워들은 용어들을 자주 인용했다. 집장사들의 집을 구경했다. (*집장사는 1900년대 초 그 당시는 생경했던 한옥을 지은다음 파는 방식을 시도하는 집장수에서 생겨난 말이다. 이제는 설계를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고 디자인적 질서나 공간의 풍요로움보다는 공사비 최저가와 최대면적을 필두로 공사를 하는 사람들을 주로 말한다.) 집장사라는 말에 약간의 부정적인 느낌이 있긴 하지만 알고 보면 대형건설사가 만든 아파트 외에 우리가 사는 대부분의 집을 만드는 사람들이고 내가 아파트에 살지 않았던 모든 날들이 집장사의 집에서 살았던 날들이다.
집장사의 집 짓는 방식은 건축교육과의 괴리가 있다. 현재의 건축사무소에서 설계하면서 만나기 어려운 작은 요소들을 집장사들의 호연지기(예를 들면 아르누보 난간스타일과 안도다다오 노출콘크리트의 만남, 거실의 강렬한 포인트월, 우물천장과 샹들리에, 하이그로시 붙박이 가구, 벽돌조에 샌드위치 창고 덧붙이기 등)라 칭하며 그런 요소들이 불쑥불쑥 나타날 때마다 감탄했다. 아파트 왕국인 서울에서 84포베이 59 쓰리베이 만 실컷 보며 살아서 창의력이 부족한 나에게는 집장사의 집이건, 건축가의 집이건, 단독주택을 구경하는 일은 신나는 일이었다.
다만 몇 년 사이 대형건축물만 설계했던 나에 비해 조금 더 작은 공간을 설계하는 경험이 많았던 종새는 1분만 훑어봐도 그 집의 치명적인 단점을 찾아냈다. 층고가 높은데 다락창이 고정창이라 더운 공기가 위로 배출이 안된다던지, 일반 세탁기가 들어가는 사이즈보다 몇 센티가 부족해서 이 집에 오면 세탁기를 바꿔야 한다는 눈썰미를 발휘해 동행하는 공인중개사와 나를 간간히 놀라게 했다. 이러다 아무 계약도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한 나는 '이 정도면 매우 아름답군…' 하며 휘뚜루마뚜루 계약을 진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섬세한 사람기준에 맞추는 것이 퀄리티를 올리는 일이라 생각하며 인내를 가졌다. 힘들어하는 공인중개사들을 위해 익살스러운 말투로 "우리 바깥분께서 가진 재산대비 눈이 많이 높아요"라는 농담으로 웃음을 빵빵 터트려드리며 뿌듯해했다.
매매부터 월세까지 알아보았지만 대출을 받아서 덜컥 전원주택 자가를 갖출 깡은 부족했다. 수많은 필터링 끝에 우리가 고른 집은 마치 전원도시에 잘못 들어선 2층짜리 아파트 같은 집이 있었다. 1층은 근린생활시설의 일반음식점으로 공실이었고 2층은 방 4개, 화장실 2개인 신축 주택이었다. 법정 용적률상 3층까지 더 지을 수 있는데도 2층까지만 지은 집이었다.
아이언맨 2편의 토니스타크는 깎아지른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끼워져 있는 건물에 살고 있다. 아이언맨에게는 직주근접이나 대중교통이 필요 없어서 최첨단의 시설의 집을 대자연의 한가운데 콕 끼워 놓은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엄청난 재력과 공간을 쉽게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의 집이라면 저런 집이 적당하다 생각했었다. 놀랍게도 양평 이층 집에 그런 면이 있었다. 자연 안에 생뚱맞게 들어선 콘크리트 덩어리, 거기에 생활감이 한 톨도 없는 반듯한 신축이라는 것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집 찾기의 시작은 월든의 오두막 아니었던가...?) 양평 이층 집은 40~50 가구 남짓한 집들을 배경으로 두고 마을 초입에 차렷자세로 서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바닥은 아스콘 포장이 되어있고 넓은 주차장이 있었다. 짙은 갈색 SUV와 스쿠터 한대를 세워놓으니 우리 집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