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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달하 Sep 28. 2016

소 판 돈으로 뭐했어

정주영은 소 판 돈으로 기업을 세웠는데


"아빠는 맨날 소 판 돈으로 집 나온 얘기 하면서, 도대체 그 돈으로 뭐하셨어요?"


가끔 오빠가 아빠에게 쏘아대는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고 정주영 회장은 소 판 돈을 훔쳐 '현대'라는 글로벌 기업을 만들었는데, 우리 아빠가 팔아치운 소 값은 어디로 갔을까. 차비며 숙박비며 당장 필요한 돈으로 쓰였을 거라 짐작할 수 있지만, 오빠는 가끔 아빠가 큰 일을 도모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가 보다.


그럼에도 나는 아빠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범행의 동기가 '나 혼자 잘 살아보자'가 아니라 '돈 벌어 효도해야지'였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할머니는 아버지가 효도하기도 전에 돌아가셨지만, 아빠가 어린 나이부터 고생해서 중국집 사장님 소리를 들은 덕분에 그 당시 가족들이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현대그룹'은 아니지만, 아빠에게는 동네 최고의 중화요리점 '현대반점'이 있었다.


오빠와 나의 놀이터. 흐릿하게 보이는 저 멀리 현대반점 간판.


초등학생이던 나는 새 학기가 시작하는 첫날이 참 싫었다. 새로운 선생님과 새 친구들을 만난다는 설렘은 좋았지만, 언제나 종례 시간이면 누런 종이에 인쇄된 가족 설문지를 받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학력, 재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질문 하나하나가 내 심장을 콕콕 찔러대는 듯했다. 내가 아는 우리 엄마 아빠는 대학 나온 내 짝꿍의 부모님만큼, 아니 그 보다 더 똑똑하고 훌륭한 분이신데, 그 종이에 적히는 우리 부모님은 그저 가방끈이 짧은, 매우 안타까운 사람일 뿐이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그 옛날 아버지가 공무원이던 내 짝꿍의 집에 문 두 짝짜리 냉장고와 금으로 만든 장식품, 그리고 오래된 도자기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선생님께서 그런 질문을 공개적으로 하고 손까지 들라고 하셨으니, 그 친구가 거짓말을 하지 않은 이상, 어린 나는 그 친구의 아버지께서 비리를 저지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가끔 우리 엄마 아빠가 조금 더 이기적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이기적이었으면, '나도 학교 갈래'하며 부모님을 졸라 교복도 마음껏 입고 공부도 마음껏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우리 부모님도 시원한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일할 수 있으셨을 텐데. 그럼 환갑이 된 우리 부모님의 온몸이 지금처럼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억지스럽지만, 엄마와 나는 '더 가질수록 욕심이 많아진다'는 속설을 우리 가족에 대입해본다. 부모님이 공부를 많이 하셨다면, 나와 오빠에게도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더 많이 하셨을 것이라는 가설. 좋은 대학가라고 등 떠밀며 힘들게 했을 거라는 가설. 나 또한 SKY를 가지 못한 내 한을 그렇게 풀 때가 있다.


"내가 좋은 대학을 나왔으면, 난 내 자식들한테 그보다 더 좋은 학교 가라고 부추겼을 거야."


엄마 아빠가 부족했으니까, 우리는 더 열심히 하라며 채찍질하셨을 수도 있는데, 우리 부모님은 그런 법이 없으셨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누구에게 나쁜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빠와 내가 부모님께 배운 전부였다. 중국집을 접고, 잠시 슈퍼를 운영하던 부모님. 어머니께서 나가신 사이, 카운터를 보던 아버지께 동네 어르신이 밀린 외상값을 갚으러 오셨다. 환한 미소를 머금고 그 돈을 받아 든 아버지께서는, 냉장고에 있던 시원한 음료수를 꺼내 드리며 고맙다는 인사로 그분을 문 앞까지 배웅해드렸다. 내 기억에 외상값이 2천 원이고, 음료수가 1천 원이었던 것 같은데. 잠시 아빠가 바보 같다 싶다가도, 착한 게 나쁜 것보다 낫지 않나 생각하며 아빠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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