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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달하 Sep 26. 2016

사랑한다면서, 왜

그렇게 사랑하면, 그냥 사랑한다고 말로 할 것이지.

아버지에게는 다섯 명의 형제가 있다. 기도를 열심히 해서 '기도', 성질을 많이 내서 '승도', 잠이 많은 '잠도', 상을 많이 받은 '상도', 자주 아팠던 '병도', 그냥 막내 '경도'. 그중에 우리 아빠는 넷째, 상도이다. 많아도 너무 많은, 그리고 매우 비슷한 큰아버지와 삼촌들의 이름을 못 외우는 나에게, 잠도 큰아버지가 알려주신 '박씨네 아들 이름 외우는 법'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터무니없지만, 덕분에 나는 이 분들의 성함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것 같다. 일찍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셨기에, 할아버지까지 남자 일곱 명이 복작이며 경북 봉화군에 터를 잡고 살았다. 아버지가 어릴 적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시지는 않았지만, 이야기 꾼 셋째 큰아버지의 아들인 순규 오빠를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그 동네에서 할아버지 댁이 가장 잘 사는 집이었다고 한다. 여차저차 망하게 된 이야기까지 들었지만, 기구한 사연의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비슷한 이름만큼이나 생김새도 비슷한 아버지의 형제들은 어릴 적부터 아무도 건들지 못하는 악동들이었다고 했다. 그 동네에서 형제들 중 누군가를 건드리면, 모두들 나서서 패 줬을 테니까. 남자들만 우글거리던 그 집 안에서는 힘센 사람이 장사였을 테니, 그렇게 힘자랑을 하고 다니셨다고 해도 못 믿을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게 나름대로 우애가 깊던 형제들은 여전히 서로를 그렇게 끔찍이 아낀다.


어느새 그 많던 머리숱은 다 잃으시고, 아이패드에 깔린 장기놀이에 푹 빠진 형제님들.

하지만 내가 그런 어른들의 애정표현을 이해하는 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 년에 두 번, 명절 때마다 우리 집안의 장손인 순한이 오빠는, 어른들의 목소리가 올라가려 하자마자 어린 동생들을 한 방에 몰아넣고 잠잠 해질 때까지 기다리게 했다. 그러면 초등학생 짜리 고만고만한 아이들 일곱 여덟 명이 쪼로로 방으로 들어가,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아마도 소주 몇 잔에 취기가 올라 그러셨겠지만, 매년 반복되는 행사에 어린 우리들은 깊은 증을 느꼈다. 정말 허무맹랑한 것은, 부질없는 싸움의 끝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눈물과 '히야, 사랑한데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사랑 고백이 뒤 따른다는 것이었다. 하아. 그래 놓고는 서로 이불을 덮어주며 따스한 저녁을 보낸 후, 꼭두새벽이면 도란도란 손을 잡고 목욕탕으로 향하셨다.


형은 형이라 서운하고, 동생은 동생이라 서운하고. 환갑이 다 된 큰아버지와 아빠, 그리고 삼촌들은 아직도 그렇게 잘 토라지신다. 다 큰 어른이 된 자식들이 보기에는 가끔 터무니없을 때가 있다. 왜 그렇게 사랑 표현이 거칠어야만 하는 걸까. 그냥 '보고 싶었는데 왜 연락 안 했냐'라고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을, 그 말을 하지 못해 빙빙 둘러 밤새도록 목소리를 높이신다. 더 우스운 사실은, 이제는 다들 주량이 줄어 술자리가 잦아든 탓에 어느새 싸움은 사라지고, 명절날 새벽 일찍 목욕탕을 가는 일만이 우리 집안 남자들의 전통이 되었다는 것이다.


첫째 큰아버지와 둘째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제는 사형제만 남았다. 마음이 여려 눈물을 곧잘 보이시는 잠도 큰아버지, 제일 무서운 사람이었다가 제일 가슴 아픈 사람이 된 우리 아빠 상도 씨, 형제들 중 유일하게 명절 칼질을 도와주시는 병도 삼촌, 욱하기 잘하는 모난 성격이지만 나에게만은 다정한 막내 경도 삼촌. 다들 손자 손녀를 보셔서 그런지 아니면 이제 기력이 많이 쇠하셔서 그런지, 이제는 더 이상 언성 높이며 싸우시지는 않지만, 우리 자식들은 아직도 명절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대구 큰집을 찾는다. 그리고 각자의 배우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놀라지 마, 다들 많이 사랑하셔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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