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당히 자주 세 가지 소원에 대해서 매우 진지하게 생각한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예상하는 것보다 더 자주, 그리고 더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나는 최선을 다해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어떤 요정이 나타나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줄 테니 말해 보라고 하는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속단할 수는 없다. 나는 언제고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침착하게 합리적인 소원들을 말하기 위해 연습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이 그리 만만하진 않을 것 같다. 아마 몇 가지 단서 조항이 있을 것이다. <"백 가지 소원을 더 들어주세요" 같은 소원은 수리 불가합니다>라든지, <소원은 항상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실현됩니다. 소원을 비는 문장을 주의깊게 구성하세요> 같은...
내 마음 속 세 가지 소원 중 항상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외국어, 특히 영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물론 이게 뭐 요정까지 나타나야 이루어질 수 있는 소망은 아니기는 하다. 열심히 공부하고 연습하면 거의 모국어처럼 영어를 쓸 수야 있겠지. 그렇지만 첫술에 배부르고 싶은 게 또 사람 마음이니까. 사족으로, '인문학 그만하게 해주세요'는 (놀랍게도) 나의 세 가지 소원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나는 아직 공부의 쓴맛을 덜 본 모양이다.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게 해 주세요>가 왜 항상 나의 1번 소원이냐 하면, 내가 몸담고 있는 인문학 업계에서는 영어가 전세계 공통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인문학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학계에서 그럴 것이다. 전세계 공통의 언어라는 것은 곧 권력이다. 우리 업계에서 중요한 모든 논문은 영어로 작성되며, 영국과 미국의 학회가 가장 권위를 가진다. 우리 업계의 빅 가이들은 모두 영어 사용자이다(아마 거의 모두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는 거꾸로, 영어로 작성되지 않은 학술적 성과들은 결국 전 세계의 학계에서 유통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아시아의 언어로 연구를 하는 학자들 중에서도 영어권의 연구자들 못지 않은, 혹은 영어권 연구자들 이상의 성과를 내놓는 사람이 분명히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성과는, 영어로 작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유통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나는 일본어를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일본 내에서 출판되는 분석미학의 저술들을 읽을 수 없고, 그 안에서 어떤 논의가 이루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영미권에서 영어로 출판되는 저술들은 유럽이니 아시아를 포함해서 거의 전 세계에서 읽힐 수 있기 때문에, 영어로 출판되는 논문들이 자연스럽게 권력을 쥐게 된다. 전 세계의 연구자들이 영미권의 학계를 쳐다보고 있는 셈이다.
글쓰기로 사유를 드러내는 인문학의 경우에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엄청난 페널티를 가진다(이는 거꾸로, 영어 사용자들은 엄청나게 유리한 배경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뜻한다! 괘씸하고 부러운지고). 인문학의 글쓰기는 이미 있는 문장들을 조립해서 사실관계에 대해 건조하게 기술하기만 하면 되는 글이 아니다. 미묘한 단어의 선택과 문장의 구성, 글의 짜임새를 만드는 방식 자체가 필자의 논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리 쓸 말이 머릿속에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글을 쓰는 연구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쓰면서 생각한다"라는 것이 많은 연구자들이 논문을 만드는 방식이다. 내 눈 앞에 어떤 말들을 늘어놓아 보면, 그것이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생각과 문자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이 바로 인문학 글쓰기이다. 그것을 감안하면, 외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외국어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이 영어로 철학 논문을 쓴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국어인 한국어로 글을 쓰는 것은 쉬운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나는 논문을 쓸 때 조각을 하거나 직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앞서 말했듯, 이미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줄줄 써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큰 부분부터 먼저 만들어(써) 놓고, 세부적인 디테일들을 깎아 나가는 감각, 혹은 부분부분 문장들을 써 놓고 그것들을 큰 그림으로 엮는 것 같은 감각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일은 매우 피로하다.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백지를 마주했을 때 겪는 공포감은 이미 악명높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쌓아올려가거나 깎아내거나 짜 나가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일이 어떻게 끝날지, 끝나기는 할지, 그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잘 모른다. 내 손가락이 어떻게 해주길 바랄 뿐....
영어와 한국어, 백지와 논문 사이에서 피로감이 극에 달할 때 나는 번역을 하곤 한다. 주로, 마음에 들었던 영어 논문을 한국어로 옮긴다. 이미 번역하려고 찜꽁(?) 해놓은 단행본들도 몇 권 있다. 번역을 직업으로 한다면 번역하는 일이 또 그지같이 느껴지겠지만, 논문을 쓸 때는 원래 논문 쓰는 것 빼고 다 재밌다.
번역의 매력은 무엇인가? 우리 윗 세대 선생님들은 아마 외국의 선진 문물(?)을 수입해오는 개념으로 번역을 많이 하셨을 것 같다. 그런 어떤 사명감 같은 것도 분명히 있다. 너무 중요한 저작인데 "이게 아직 번역이 안 돼 있어?"라는 놀라움을 내가 아직 느낀다는 것은, 중요한 저작은 한국어로 옮겨져야 하고, 그래서 더 많은 한국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아직 가지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물론 그런 (우리 업계 기준) '중요한 저작'은 번역해놔도 거의 아무도 안 읽기는 한다... 그래도 미래의 학문후속세대를 위해서.. 흑흑.
그런 어떤 공적인 사명감 말고, 조금 더 사적인 즐거움도 있다. 이를테면 '딱 맞는' 표현을 찾아냈을 때의 즐거움이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이전에 어떤 논문에서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이 시작될 때'라는 의미의 영어 문장을 "두 사람의 우정이 싹틀 무렵"이라고 번역해본 적이 있었다. 그걸 누가 칭찬해줬던 것도 아니고 뭐 대단히 혁신적인 발전을 이룩해낸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 번역문을 썼을 때 톡 터져나오는 즐거움은 분명히 있다. 번역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문장을 읽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재구성하는 일은 매우 다르다. 학술번역의 경우에는 전문 용어들도 번역이 까다롭다. 그런 도전들을 해결해나가는 것이 번역의 또 다른 즐거움 중 하나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번역을 좋아하는 이유는, 번역을 하는 일은 마치 그 글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논문들을 보다 보면, 그냥 아 좋은 논의다, 하는 논문들도 있지만, 이건 정말 좋다고 생각되는 것들도 많은데, 때로 너무 좋은 논문이라서 이 글이 내 글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는 때가 있다. 내가 번역하기로 마음먹거나 자발적으로 번역을 하는 글들은 그런 글들이다. 이걸 내가 썼어야 했는데, 하는 마음, 혹은 그런 글을 앞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그 글을 번역하도록 추동한다. 외국어 문장 하나하나를 나의 모국어로 바꾸어 써 보는 과정은, 그 글의 권한이 어느 정도 나에게 있는 것 같은 느낌(착각이겠지만..ㅎㅎ)을 준다.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잠시나마 그 글의 한국인 버전 '저자'가 되는 것이다.
내 논문을 쓰는 일과 번역하는 일은 각각, 백지에 새로 그림을 그리는 일과 따라 그리기 세트를 가지고 그림 그리는 일에 비유될 수 있다. 번역은 안전하다. 이미 훌륭하게 완성된 글이 있기 때문이다. 번역은 그 완성된 글의 윤곽선을 따라 정해진 대로 색칠을 해 나가는 일이다. 이 일은 단조로울 수도 있지만 그 범위 안에서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최선의 기교를 뽐낼 수 있다는 점에서 즐거움을 준다.
번역은 필사와는 분명히 다른 경험이다. 필사도 어떤 글이나 문장에 대한 소유욕이 발현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필사를 할 때 우리가 원문을 재구성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번역을 할 때에는 문장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번역을 하는 일은 원래의 문장을 그대로 베껴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의 의미를 유지하면서 그것을 나의 모국어로 바꾸어 써 주는 일이다. 번역을 함으로써 나는 원문의 저자가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글의 한국어 버전의 "저자"가 됨으로써 그 글을 어떤 의미에서 '소유'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가진 번역에의 욕망에 대한 설명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삼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은 여전히 굴뚝같고(수많은 철학책들을 정말 쉽고 빨리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일일이 단어를 찾아보지 않고서도!), 영어가 권력을 잡고 있는 우리 학계에 항상 짜증이 좀 나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때로는 번역이라는 작업을 통해 남의 글을 잠시나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외국어 화자로서 누리는 소소한 특권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