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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Aug 11. 2020

여섯째날, 왜 우리한테 이런 일이 생긴건지

내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온 세상이 나를 시험하는 기분이었다

6.28

  엄마는 매일 더 안좋아졌다. 새벽이 되면 더 아파했다. 새벽이 깊어갈수록 끙끙 앓는 소리가 서서히 멀어지듯 잠에 빠지는 내 자신이 미웠다. 엄마 대신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맞던 하루 3번 진통제로는 통증이 잡히지 않게 되었다. 간호사에게 말했더니 오늘부터 마약성 진통제를 쓰겠다고 했다. 5일 동안 계속되던 금식이 풀리고 식사를 시작했는데 밥을 세 숟가락 이상 삼키지 못했고 아침에 걸어서 양치질을 하러 갔던 엄마가 그 날 오후가 되면서는 휠체어가 없이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마약성 진통제로 다리가 후들거리고 몸에 열이 나고 정신이 몽롱해진다고 했다. 그러다가도 한 번씩 률이 배 안고프냐고 밥 먹으러 가라고 인상을 찌푸렸는데 그 표정이 아직도 눈앞에 보여서 미칠 노릇이다.


  나는 엄마 침대 옆 간이침대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암도 정보력 싸움이라고 보호자의 공부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췌장암은 어떤 이유에서 조기발견이 어려운지, 췌장암 3기와 4기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인지, 표준치료가 무엇인지, 항암제의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통증이 오면 어떻게 관리해야하는지, 음식은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각 병원 별 명의는 누가 있는지 등등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엄마는 글자를 읽는 것이 힘들다고 해서 내가 옆에서 읽어주면서 같이 공부했다. 

  암에 대해 공부를 할수록 ‘앞으로의 나날은 지금까지의 일상과 완전히 다르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 중 암환자가 생기면 모든 구성원은 암환자를 중심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암환자들과 그들의 보호자가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니, 나도 이제 그들과 한 배를 탄 것이다. 온 힘을 다 해 싸워보겠노라고 비장한 결심을 했다.    

  

암환우카페에 가입해보니 다들 이렇게 적으면서 간호한다길래 나도 입원 첫 날부터 기록 해 보았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한 그 날부터 나는 혼자 거의 모든 것을 책임졌다. 외가 쪽에는 마땅히 내가 도움을 청할 어른이 없었다. 이것은 우리 엄마가 암환자가 되었다 해도 병원으로 전복죽이니 삼계탕이니 보양식을 싸 들고 올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브래들리는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해 함께 한국의 의료 시스템이나 대사치료 같은 사항에 대해서 의논할 수가 없었다. 한국 음식도 잘 몰라서 엄마가 먹고 싶어 했던 ‘누룽지’나 ‘물회’같은 음식을 요리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멘탈도 나보다 약해서 6인실 병실에서 엄마를 붙잡고 대성통곡을 했다고 하니 더더욱 ‘내가 강하게 버텨야겠구나.’ 다짐했다.

  간호에 있어서도 나는 혼자였다. 브래들리는 학기를 마무리하기 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병원을 지킬 수 없었고 남동생도 일에 묶여 병원에 올 수 없었다. 하루 24시간을 병원에서 보내며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은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엄마에게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희망을 품다가도, 잡히지 않는 통증과 좋지 않은 피검사 수치를 보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한 번이라도 크게 소리 내서 엉엉 울어 보고 싶었는데 울 데도 없고 울 시간도 없었다. 엄마가 물을 떠다달라고 하면 바깥 정수기에서 물을 떠 오는 길에 조금 울었다. 앞이 하나도 안보이는 깜깜한 동굴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세상이 참 너무한다 싶었다. 6살 때 엄마 아빠가 이혼을 하고, 엄마와 이모 따라 사이비 교회에 10년을 끌려 다니다가 혼자 빠져나와서 엄마와 인연을 끊고 살았다. 3년 만에 엄마와 극적인 화해를 하고 드디어 행복했는데 나한테 또 이런 일이 생긴다니, 세상이 나를 시험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기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면 ‘엄마는 또 얼마나 억울해서 눈물이 날까’ 싶은 것이었다. 24살에 나를 낳고 남편은 바람을 피우고, 30에 애 둘을 안고 이혼을 하고 위자료로 구한 전셋집은 사기당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사이비 교회 사람들 뿐. 이 고생, 저 고생 다 하고 이제 조금 편안할라 치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나? 세상이 내가 죽기를 바라는 것일까? 실컷 욕하고 원망하고 싶은데 누구를 원망해야할지 몰라서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괴로운 시간이었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어 출판사에서 병문안을 오셨다. 코로나 때문에 상주 보호자가 아닌 단순 면회 손님은 병원 입장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엄마와 함께 로비 밖으로 나갔다. 엄마는 병원에 들어오던 날 이후 바깥 공기를 한 번도 쐬지 못한 터라 상쾌하다며 좋아했다. 생각 해 보니 이 날이 엄마가 가장 활기찼던 날인 것 같다. 

  출판사 작가님과 엄마는 인사를 나누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엄마는 두 번째 책은 바느질과 인생을 함께 풀어 나가는 이야기로 구상해 보겠다고 했다. 이번 책의 작가 설명회나 북 콘서트는 항암 일정과 컨디션을 고려해서 잘 정해보자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병문안을 마치고 병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엄마는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몰아쉬었다. 혹시 어디가 불편한가 싶어 ‘엄마, 왜 그래? 어디 아파?’하고 물었는데 엄마가 답했다. ‘아니, 설레서.’

엄마는 항암 준비를 위한 수액을 맞고 있었고, 책이 나오는 것이 설렌다고 했다.
엄마는 한복을 입고 사인회를 할거라며 신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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