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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Aug 12. 2020

나는 참 복도 많구나

이 상황에 이런 생각을 하는게 맞나 싶기도 하고. 

 6.28

 병원에 입성한 이후, 나를 버티게 해준 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에게도 입도 뻥긋 하지 않고 혼자 버텨보려는 마음 반, 조금이라도 해답을 찾을 수 있다면 있는 힘껏 매달려 보고 싶은 마음 반.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런 마음들이 들었다. 

  주변 친구, 언니, 선생님, 엄마 친구 분들께 ‘췌장암’을 겪으신 분에 대한 이야기를 수소문했지만 딱히 도움은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다지 좋은 결과가 아니어서 나에게 전달해주지 않은 것 같다. 췌장암은 발병이후 5년 생존율이 10퍼센트도 되지 않는 극악의 암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할 때 췌장암 오픈카톡방을 찾아 내 사연을 구구절절 적어 올렸다. 엄마도 워낙 젊고, 나도 나이가 어린 보호자다 보니 다들 한 마음 한 뜻으로 조언을 해 주셨다. 300명이 넘는 카톡방인데 다들 길게 위로의 메시지를 주셔서 하나하나 캡쳐 해 뒀다가 마음이 힘들 때 마다 최면을 걸 듯이 읽고 또 읽었다. 또한 간병에 필요한 정보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정확한 대화방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대충 ‘행복방’이라고 칭하겠다. 17일간의 투병생활동안 ‘행복방’이 없었다면 나는 정말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5일만의 금식이 깨졌지만 엄마는 일반식을 한 숟가락도 삼키기 힘들어했다. 처음에는 나도 간병이 처음이고 뭘 잘 몰라서 ‘엄마가 못 먹겠다고 하는데 어쩔 수 없지’ 싶었는데 생각 해 보니 이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덜컥 마음이 불안해 행복방에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었더니 ‘삼성병원 지하 편의점에 뉴케어가 있는데 그걸 사와라. 우리 어머니도 다른건 못 드셔도 뉴케어 구수한 맛을 빨대 꼽아서 드리면 잘 삼키시더라.’고 조언을 해주셨다. 연이어 다른 분들도 ‘저희 아버지는 새콤한 것을 먹고 입맛을 찾으셨다. 과일을 씹고 뱉었다가 밥을 먹어 보아라’, ‘아임리얼 토마토 쥬스에는 첨가물이 없으니 그걸 먹어보아라.’는 등 자세하고 꼭 필요한 조언을 해주셨다. 바로 지하로 달려가서 뉴케어와 아임리얼을 사왔다. 그리고 엄마가 그것을 한 모금, 두 모금 삼켰을 때 눈물 나게 감사했다. 한 모금이라도 삼켜주는 엄마에게 그리고 행복방 사람들에게 정말이지 눈물나게 감사했다.


  글을 쓰려고 기억을 되살리다보니 당시에 나를 도와주신 분들이 정말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상황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는 참 복이 많구나 싶기도 하다.


  행복방에서 내가 적어 올린 사연을 보고 내게 따로 연락을 해온 분이 계셨다. 지금은 언니라고 부르며 자주 연락하고, 내가 의지를 많이 하고 있다. 그 분도 나처럼 엄마를 간호하고 계신 젊은 보호자인데, 나를 꼭 만나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병원 카페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뉴케어와 선식, 텀블러, 과일 한 가득을 내게 안겨주셨다. 그리고 자신이 엄마를 간호하면서 겪었던 경험들, 속 이야기, 힘들었던 점을 내게 말씀해주시며 나를 다독였다. 이후 내가 병원에서 숱하게 밤을 샐 때 따뜻한 밥 한 끼 먹자고 계속 자기 집에 와서 자라고 해주었는데 내가 고집 부리느라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언니가 사실 그 때 조금 서운했다고 했는데 그 말마저 미안하고 또 감사하다. 지금 생각해도 언니의 위로는 다른 누구의 위로보다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하루하루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을 만큼 고됐었는데 언니랑 이야기를 하고 나면 정말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해지고 잠에도 들 수 있었다.


  주변 친구들에게는 이상하게 입이 잘 안떨어지고 내 상황을 이야기하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다들 나이가 어리다보니 ‘췌장암’이라는 질병에 무지하기도 하고, 생판 처음부터 엄마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친한 언니인 영진(가명)이가 나에게 안부를 묻길래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사실을 이야기 했다. 그 때부터 언니는 각종 먹을거리와 생필품을 병원으로 싸와서 나를 챙겨주었다. 충남 당진에서 교사를 하고 있는데 퇴근하고 서울로 와서 새벽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다음 날 당진으로 출근을 하고 그랬다. 한 날은 언니가 나보다 더 많이 울길래 갑자기 좀 웃겨서 언니가 왜 더 많이 우냐고 물었는데 ‘슬퍼서..’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 마음이 찡했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로비 의자에 몇 시간이고 앉아 내 옆을 지켜준 언니를 보며 어떻게 저렇게 할까 참 많이 고마웠다. 장례가 끝나고 언니가 나에게 이제 자기를 친언니라고 생각하라고 했는데, 항상 언니가 갖고 싶었던 나로서는 홍률이 아닌 박률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고 좋았다.    


  사실 엄마가 아프기 전부터 나는 엄마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라는 말을 많이 했다. 정말로 100% 진심이었다. 엄마가 없는 세상에서 나는 단 1분도 존재하기 힘들 것 같았고 엄마가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 죽는 것 보다 더 무서웠기 때문에 나는 항상 그렇게 생각 해 왔다. 엄마가 아프게 되자 나는 어디에서 어떻게 죽어야할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목을 매달고 죽기에는 우리 집에 목을 매달 장소가 없었고 한강에 뛰어내리자니 마포대교 중간에 내려주는 버스 정류장이 없어서 멀리서 내려서 다시 다리로 거슬러 올라가야했다. 번개탄을 피울 차도 없었다. 그냥 엄마가 숨을 거두는 침대 옆에서 동시에 죽으면 딱 좋겠다 싶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힘드니 간호사한테 프로포폴 한 대만 맞혀달라고 하고 싶었다. 이런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었는데 내 목소리에 삶의 미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 정말로 얘 이렇게 가는 거 아닌가 싶었단다. 그 친구도 바로 광주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일주일이 넘게 나와 병원에서 동고동락했다.


  이외에도 다 적지는 못했지만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와 나를 안아주고, 함께 울어주고, 따뜻한 밥을 사줬다. 병원 지하에 파는 음식과 카페에 파는 빵은 종류별로 다 먹어본 것 같다. 그렇게 친구들, 언니들, 선생님들, 가족들, 엄마 친구분들, 엄마 친구의 친구분들, 행복방 사람들에게서 힘을 얻으며 엄마 곁을 지켰다. 


  ‘그래, 적어도 오늘은 엄마가 내 옆에서 숨 쉬고 있잖아.’ 하며 힘을 낸 순간들. 이 글을 빌어 그들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힘들 때 옆에 있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눈물 나는 일인지 이번 일을 통해 알았다. 댓글로 엄마를 위로해주셨던, 그리고 지금도 위로해 주시는 많은 분들에게도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감사합니다.

엄마!! 가만 생각 해 보니 우리가 참 복도 많구나 싶기도 하고. 엄마 생각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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