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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Aug 19. 2020

내가 많이 부족한 보호자라 엄마가 중환자실로 갔을까

6.30 일주일째, 엄마가 중환자실에 들어간 날.

6.30일쯤의 일은 한편으로 끝낼 수가 없어서 여러 편으로 나눠서 썼어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9일에서 30일로 넘어가던 새벽이 아직도 눈에 훤하다. 잠에 들기 전, 엄마는 이가 얼얼해질 정도로 차가운 물에 양치질을 하고 싶다고 했고 나는 내가 구할 수 있는 한 가장 차가운 물을 떠왔다. 엄마를 부축해 병실 안에 있는 세면대에서 양치질 하는 것을 도왔다. 엄마는 너무 개운한 양치질을 했다며 좋아했다. 침대에 눕기 전에 병실 창문 앞에 서서 야경을 봤다.

 ‘엄마, 자기 전에 야경 한 번 볼까? 우리가 언제 또 강남 야경을 보면서 자겠어.’ 

 ‘그래.’    


  엄마는 잠에 들 수 있는 편한 자세를 찾아 잠에 들었다. 사실은 잠을 잔다는 표현보다는 진통제 기운이 있을 때 깜빡 존다는 표현이 맞겠다. 잠을 자면서도 계속 덥고 땀이 난다며 많이 힘들어했다. 그 때는 병실 에어컨이 약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암성 염증으로 인한 미열이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병실을 바꿔야하나’ ‘침대 위치를 바꿔야하나’를 고민했으니, 참 바보 같은 보호자였구나 싶다. 엄마가 많이 더워했기 때문에 나는 차가운 물을 계속 떠와서 수건에 적셔 엄마 몸을 닦아주었다. 눈을 반쯤 뜨고 찬물을 뜨러 새벽 내내 복도를 좀비처럼 돌아다녔어야 했는데, 혹시나 이 글을 보는 어린 보호자가 있다면 나의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 이럴 때는 간호사에게 얼음팩을 달라고 하면 얼음팩을, 무려 시트에 싼 얼음팩을 제공해준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우리 엄마 더 시원할 수 있었을텐데 부족한 보호자 만나 고생만 했네.    


  암 병동에 가보면 벽이나 침대, 각종 포스터에 ‘암, 통증 관리가 관건입니다. 참지마세요.’ 같은 문구가 즐비하다. ‘통증’. 암이라는 질병을 처음 접하고부터 새롭게 다가오는 단어였다. 암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원인이 바로 통증이라고 한다. 지속적으로 은은하게 계속 아파오는 통증부터 순간순간 쇼크가 와서 혼수상태에 이르게 할 만큼의 급성 통증까지 그 종류가 아주 다양하다. 이 때 통증을 10단계로 쪼개어 1단계부터 10단계 중 어느 단계만큼 아픈지를 스스로 정확히 파악해서 그 통증에 따라 진통제를 달리 해야 한다. 1단계가 ‘불편하다’ 싶게 아픈 것이라면 10은 정신을 잃을 만큼 아픈 단계이다. 진통제의 종류도 천차만별이라 환자마다 맞는 진통제가 다들 다르다고 했다.

  이걸 보고 나는 계속해서 엄마한테 ‘엄마 지금은 몇 단계야?’ 하고 물었다. 그리고 어떤 진통제를 써야할지 간호사와 의논했다. ‘간호사님, 엄마가 평소엔 2~3만큼 아프다가 한번씩 5단계만큼 아프대요. 속효성 진통제(갑자기 아플 때 먹는 진통제 종류)를 먹어야 할 것 같아요.’ 라고 했을 때 나 스스로 참 뿌듯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았는데 엄마는 5단계가 아니었다. 그 이상이었다.

  딸이 간호를 할 때 따라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엄마는 내가 걱정할까봐 본인이 아픈 단계를 축소해서 말 했던 것이다. 엄마가 혼수상태에 들어가고 나서야 깨달았다. 정신을 잃을 만큼 아파했는데 엄마의 통증 단계는 5단계를 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가슴이 미어지게 슬프다는 것이 이런 걸까 그 때 알았던 것 같다. 가슴을 붙잡고 울었다. 엄마 내가 이제 알아서 정말 미안해.


  그 즈음 삼성병원으로 엄마를 데려온 것이 잘못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또한 나를 더욱 괴롭게 했다. 병원에서 그저 손을 놓고 '우리도 이유를 모른다'고 하고 있으니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점점 의료진에 대한 의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췌장암’하면 서울아산병원인데 그 땐 그걸 몰라서 그냥 삼성병원으로 갔구나, 하고 후회했다. 신촌세브란스, 서울아산병원 이렇게 두 병원이 췌장암으로 유명했다. 전원을 할 수는 없을까, 보호자 진료만이라도 볼 수 없을까 알아보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외래진료가 일주일이나 뒤였다. 병원에 인맥이 있으면 바로 된다던데, 나는 참 여러모로 부족한 보호자였다.


  30일 오후 6시 정도에 엄마가 중환자실로 병실을 옮겨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정말로 온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누워있으면 연기처럼 스르륵 내가 사라지는 상상을 했다. 혹은 나를 짓누르는 너무 무거운 무언가에 깔려 질식할 것만 같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산다는 것이 참 버거운 일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 엄마가 중환자라니, 방금까지 나랑 이야기 하고 웃고 농담하던 엄마가 중환자라니. 이렇게 정신이 멀쩡한데, 기저귀를 깔고 누워 침대에서 대소변을 해결해야하는 중환자실에 가야한다니. 중환자실 주치의 선생님께 눈물을 뚝뚝 흘리며 중환자실에 들어가면 엄마가 다시 나올 수는 있는거냐고 물었다. 주치의 선생님은 어머니 상태가 당장 위중한 상태는 아니고, 일반 병동에 있는 것 보다 더 자주, 더 많이 보살피기 위해 가는 것이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열흘 뒤 이 주치의 선생님은 엄마 사망선고를 내리셨다.



엄마, 나는 이제 누구랑 여행다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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