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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자꾸 웃었지. 나도 그랬지.

by 조달리

오후 3시가 책모임이라 오전 9시쯤 책을 천천히 살펴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준비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어영부영 시작된 모임.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져 결국 강의실을 옮겼고, 커다란 강의실에서 책모임을 시작하려는데 내 목소리가 들리지를 않는다. 결국 전기 기사님 두 분이 와서 마이크를 설치하고, 옆 강의실까지 꼬여서 얽힌 길고 긴 마이크 끈을 정리하며 돌아다닌 후 겨우 책모임을 시작하려는데 아 참. 준비가 아.. 준비가 덜 됐었지. 등장인물 이름을 말하려는데 기억이 안 나는 거다. 내 손엔 책도 없고. 참가자들은 제각각 다른 버전의 책을 들고 있었고, 겨우겨우 내 손에 들어온 책은 만화책 버전. 아무리 넘겨도 내가 찾는 페이지가 안 나온다. 아... 다시 또 힘들게 등장인물을 기억해 낸 후 ‘샤샤 부인(어디 나오는 부인이신지?)’이라 말하는데 갑자기 6살 꼬맹이로 변해버린 우리집 청소년이 뒤에서 나를 안으면서 민다. 나 모임 진행해야 하는데.. "하지 마.." "하지 마.." 마이크에 손을 대고 살짝 말했지만 아이는 나를 계속 안아서 결국 "하지 말라고!"라고 높은 목소리로. 그 목소리는 마이크를 타고……..아... 망했다..망했다….화들짝 놀라 깼던 아침.


길게 하고 있는 도서관 청소년 책모임 1학기 과정이 끝나는 날 아침이었는데 어지간히 부담스러웠나보다. 하지만 잘 할 수 있다는 꿈으로 해석하고 잘 한 것으로 실천하면 되지! 다음 달이면 곧바로 2학기 과정이 시작되어 내 스케줄엔 변함이 없지만 학생들이 바뀔 테니 또 그 분위기가 달라질 터.


중학교 1-2학년 대상인 책모임의 시작은 엇비슷하다.

엄마가 하라고 했다.

엄마가 이거 안 하면 국어학원 보낸다고 했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그냥 시작했다.


백 퍼센트 자발적으로 시작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 그래도 참가 지분 중 30~50 퍼센트 정도는 자기 의지라고 하는 학생들의 말을 꾹 잡고 끌어 한 학기를 달린다. 사실 2주에 한 권 정도 읽는 것도 어렵다. 일상을 살면서 책 한 권 읽어내기가 그리 쉬운가. 안 읽고 살던 시절이 나도 아주 길어서 안다. 우리 때와 달리 다닐 학원도 더 많고, 봐야 할 콘텐츠도 더 많은 시절에 책이라니...


매번 학생들에게 감사했던 이유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꼬박꼬박 읽어왔다. 사실 이거면 거의 성공이다.

책 안 읽어오는 책모임이 태반이다. 책모임 쫌 해 본 사람은 다 아는 진실이자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끼리끼리만 아는 사실이다.

물론 책을 구하지 못해서, 시간이 없어서 읽어오지 못한 학생들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성실하게 읽어왔다. 매 학기마다 그런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학생수가 늘지 않아도, 참석률이 줄어도 그들에게 기대어 진행했다. 그렇게 2년 넘게 버티니 이제 제법 꾸준히 학생들이 신청하는 강좌가 됐다. 도서관에서 끈기 있게 기다려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 신속한 ‘성과'가 드러나야 지속될 수 있는 대부분의 공공기관에서 이런 인내를 가지긴 쉽지 않다. 다르게 얘기하면 그만큼 청소년 강좌, 특히 '공부시간'을 좀(?) 먹는 이런 강좌는 다각도의 공을 들여야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얘기다.


도서관 관장님, 사서 선생님들! 멋집니다. 이런 '일잘러'들과 같이 일하는 기분도 꽤 좋다.


지루해 하는 얼굴이 많이 보인 날은 일주일 내내 고민과 후회.

철학책이나 사회 관련 책, 정보나 지식 전달 책이면 더 그랬다. 성인 참가자들만큼 인생의 경험이 크게 없고, 매 사안마다 '생각'을 해 볼 기회가 많이 없었던 이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들 입장에선 늘 어려웠고, 자주 곤란했다.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하면서도 그만두겠다고 말하지 못했던 건 남아 있는 어떤 목소리 때문이었다.


인터넷으로 배운 페미니스트가 얼마나 잘못된 배움이었는지, 더 크기 전에 이 책을 읽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한 남학생의 떨리던 목소리.

문학과 달리 질문을 자꾸 던지던 철학책이 어려웠지만 계속 생각이 난다는 목소리.

가정 폭력으로 고통받는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책 내용이 얼마 전 학교에서 있었던 일과 너무 비슷해서 놀랬다는 목소리.

처음엔 엄마가 등 떠밀어 그냥 앉아만 있었는데 이게 내 인생에서 중요한 축이 되었구나 생각했다는 목소리.


그 목소리 때문에, 덕분에 계속 모임한다. 언제나 긴장되지만 자주 재미있다. 비록 우리집 청소년들은 이렇게 읽고 있지 않지만, 이렇게라도 읽는 청소년이 있다면 내가 조금이라도 가이드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임한다. 너무 강하지 않게, 너무 절실하게 보이지 않게, 책이 정말정말 중요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그렇게 조금씩 가볍고 넓게 옆에 있는 마음으로 같이 읽는다.


좋아하는 친구에게 고백할 예정이라는 이야기까지 털어놓은 마지막 모임이었다(재호야, 고백은 성공했어?). 쑥스럽게 웃으며 입을 다물지 못한 아이의 표정을 생각하는 지금 내 입도 벙긋벙긋이다. 안전하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모임.

재밌고 재밌고 재밌다!


지난 학기에 학생들이 특히 좋아했던 책은

<유진과 유진>, <10대를 위한 정의란 무엇인가>, <유튜브 쫌 아는 10대>, <행운이 너에게로 오는 중!>

또래 이야기는 언제나 옳지.

알콩달콩 연애 이야기가 더해지면 더 옳지.

다들 연애도 안 하면서 마구마구 웃었지.

언젠가 할 거라며 자꾸자꾸 웃었지.

나도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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