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각본』의 저자 김지혜 씨가 프롤로그에 쓴 도입부다.
책 제목이 가족 각본인 이유다. 이 각본은 철저히 성별 분업적이다. 각자 맡은 배역에 충실할 것, 이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 성별 변경이나 역할 불이행은 예정대로 진행되어야 할 연극에 치명적이다. 하지만 어느 특정 가족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성별 하나만으로 내게 어울리지도, 원하지도 않는 배역에 영원히 머물러야 한다면 이 연극은 누구를, 무엇을 위해서인가? 국가의 전제조건인 '인구'를 위해서 이 배역에 충실해야만 하는 것일까?
5학년 학생들과 각자의 지난 명절 풍경을 들여다보았다.
"친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요. 다들 쉬고, 과일 먹고 있는데 엄마만 설거지 했어요."
왜 엄마만 설거지 한 것 같냐고, 그 이유가 무엇인 것 같냐고 학생에게 물었다.
"음, 아빠의 원래 집에 가서 그런 것 같아요. 아빠 원래 집에 갔으니까 엄마가 일하는 거죠."
"아, 그럼 엄마의 원래 집에 가면 모두가 쉬고 있을 때, 아빠만 설거지 해요?"
"아..... 외할머니 집에 가면 아빠는 청소를 좀 하긴 해요. 그때 다른 사람들이 모두 쉬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의 원래 집에 가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외할머니네 가면요. 엄마랑 이모들이 다 일하거든요. 요리도 다하고, 설거지랑 청소랑 다요. 그런데 아빠랑 이모부들은 티비보면서 놀아요. 거긴 엄마의 원래집이잖아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다른 학생이 대화를 이었다.
"원래 집으로 돌아갔을 때 새로 들어온 사람이라고 다 일하는 건 아니네요, 흠."
젠더수업에서 딱히 가르치지 않아도 학생들이 해석을 한다. 사실을 그대로 짚어주기만 해도 성별 위계가 드러나니까.
"헐! 그럼 나도 커서 결혼하고 아기 낳으면 엄마처럼 내 남편이 쉬고 놀 때, 나는 설거지 하고 밥 해야 해요?"
이 상황에서 누가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있느냐는 질문은 빼고 싶다. 내가 알기론 두 집 상황이 다른데(여성도 가정경제에 기여한다면 저 상황이 납득되지 않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연한 것 아니냐는 본질을 흐리는 후속 질문으로 이어질 질문이기 때문이다), 가정경제를 주로 남성 홀로 책임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가 반드시 바탕하므로 상황이 완벽히 다르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학생의 마지막 질문에 희망적인 답을 하기 위해서 '젠더'공부를 하는데, 이 공부는 반드시 '실천'을 겸해야 아주 조금이라도 길이 난다. 희망적인 답이 종이에만 있는 현실은 희망이 아니니까. 그리고 이 '실천'은 개인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사회가 같이 해결하지 않으면 결코 나아갈 수 없으므로 '함께' '계속' 공부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고등학생 사회과학 독서모임 책으로 『이상한 정상가족』-2022년 개정판을 선택했다. 가정 내 아동 학대 문제를 심도 있게 분석한 2017년도 책인데, 이 책이 화제가 된 이후 저자 김희경이 지난 문재인 정권에서 여가부 차관직을 맡으며, 바뀐 부분을, 여전히 바뀌지 않은 부분을 보완해 2022년에개정판을 냈다. 가정 내 아동 학대 문제를 분석하다 보면 이 모두가 '가족'문제와 맞닿아 있다고 김희경은 말한다. 앞서 소개한 『가족각본』도 결국은 아동을 향한다. 기존의 가족 질서에 들어가지 않는 다양한 가족 형태를 부정하고, 불평등한 현실에 눈감으면서 가족의 가치를 강조하는 사회에서 제일 먼저 상처받는 자는 '아동'이라고 가족각본의 저자 김지혜 역시 김희경과 한 목소리를 낸다.
수많은 아동들이 가족 배경을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차별을 겪는다. 아동이 겪는 온갖 놀림과 괴롭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족 형태, 가족소득, 가족 구성원의 특징 등 가족에 관한 이유 때문인 경우들이 많다. 가족의 상황이 아동들 사이에 권력관계를 만든다. 흔히 그렇게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다며 운명으로 받아들이곤 하지만, 이는 가장 부정의한 불평등이기도 하다. 어느 가족에게서 태어났는지에 따라 누구는 존중을 받는 반면 누구는 무시를 당하고, 누구는 풍족한 기회를 얻는 반면 누구는 생존도 어렵다면, 벌거벗은 아기 때부터 우리의 몸에 계급이 새겨져 있다는 뜻인 거다.
동생의 생김새가 남과 다르다고 친구를 놀린 적이 있다. 아직까지 부끄럽다. 가족의 형태가 남과 다르다고 무시한 적도 있다. 부끄럽다는 말도 못 하겠다. '다양성을 향하는 교육'을 받지 못해서라고 이제 와서 해석하는 중이다. '아동'을 존중하지도 않았으면서, '정상가족'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떳떳했고, 떵떵거렸던 부모세대 역시 이런 교육이 부재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이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배우지 못했다'가 '그래서 그래도 된다'는 아니다). 당연한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특정 가족'의 형태는 실로 다양하다는 것, 이 다양성을 포괄하기 위해서 새로운 제도를 설계하며 대안적 제도를 고안하는 것이 '열린 사회'의 역할이자 구성원의 책임이다. 책임의 시작은 현실파악이다. 우리나라의 대안적 제도가 얼마나 늦었는지, 누구를 배제하는지,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지 면밀히 살피는 책이 고마운 이유다(사실 고맙다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다. 마땅하다고 해야 할까).
『이상한 정상가족』은 '정상가족'이라 일컬어지는 가족형태가 실은 매우 '이상'하다는 사실을 제목으로 먼저 보여준다. 미혼모가 아이를 낳으면 딸을 가족에서 빼버리는 '정상가족', 출생인구를 그토록 걱정하면서 가장 오래, 가장 많이 아동을 해외로 수출한 나라, 학대를 피해 도망쳤지만 곧바로 부모에게 되돌려버리는 경찰, 밖에서는 행복해 보이지만 곪아있는 정상가족의 아동들. 모두 '정상가족'제도 안에서 고통을 주고받는 가해자와 피해자들이다. 청소년도 마찬가지. 가족 단위로 경쟁의 사다리를 오르는 이 사회에서 '설계된' 삶을 사느라 영원히 아이인 아이들, 가족의 실패를 증명해야만 '복지'의 개념으로 개인을 '도와주는' 제도에서 너무 일찍 어른이 된 아이들. 이들이 살아갈 사회에서 이제 생물학적 나이로 진짜 어른이 된 우리 세대가 할 일은 대안적 제도 발명은 고사하고, 그나마 발명된 제도를 방해는 안 해야 되지 않을까? 다시 '공부'로 돌아온다. 치열한 공부. 학습하기 때문에 나는 사람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 이 학습 역시 본질은 실천이고, 실천은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 내가 책모임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고등학생들과의 만남이 무섭고 기대되는 이유는 그 시간이, 그곳이 학습의 최전선이기 때문이다. 정상(正常:특별한 변동이나 탈이 없는 상태) 이 아닌 가족을 이상하게만 볼 것이 아니라 이 가족형태만 규범으로 보는 것을 이상하다고도 생각해 보는 시간이길 희망한다. 이상(異常)에는 정상적인 것과 다르다는 뜻도 있지만, 기능이나 활동이 원활하지 못하고, 의문이 생기거나 의심스럽다는 뜻도 있다. 정상가족만을 향하는 사회는 확실히 이상하고(정상가족의 기능이나 활동이 원활하지 못하고) 그러므로 이상(이제는 의문을 가져야 할)하다. 정상가족만이 이상(理想: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상태) 가족이 아닌 다양한 이상異常가족을 이상理想한다. 누구나 이 이상異常에 언젠가, 반드시 포함될 거니까.
『이상한 정상가족』 독서모임에서 이쁜 남학생 일곱 명을 만난 마음이 너무 부풀러올라 돌아오는 길 내내 어지러웠다.
'정상가족'이라는 말에서 학생들은 가족의 형태보다는 '소통'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가족, 웃어도 되고 울어도 되지만 이해하며 감정을 나누는 가족이 '정상'같다고 말했다.
이런 이미지로 대화가 시작되어 좋았다. 이때부터 사실 심쿵이었다. 티 안내려고 애썼는데...났어도 뭐 별 수 없고.
책이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단면에 대한 지적과 우리가 향할 곳을 학생들은 잘 이해하고 있었고 안타까워했고, 여태 잘 몰랐던 내용을 이제 알아서 다행인 동시에 자꾸 마음이 쓰인다고 했다.
해외입양문제는 알고는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나와 연결지어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아동'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다루다 보니 결코 나와 떨어져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동반 자살'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 삶이 얼마나 어려우면 자식과 함께 동반자살을 했겠나 로만 생각했었는데 그 말이 성립 불가라는 사실을 이제 배웠다고 했다.
알게 되었으니 자꾸 얘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책을 읽지 않은 친구와도 이 주제를 꺼낸 후에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누고 싶다고 말했고, 사교육이 낳은 불평등한 입시제도 및 엘리트주의가 계급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된 후 책에서 지적한대로, 부모의 '과잉보호'가 싫지만, 계층하락이 무섭다고 했다.
부모에게 너무 의존적인 지금 필요한 것은 혼자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친구와 보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인데 이 환경이 불가능해서 힘들다고 했다. 학교 상대평가가 정말 괴롭다고 했다. 경쟁하고 싶지 않은 상대와 경쟁하는 것도, 스스로 성장하며 배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없는 비교제도가 배움을 재미없게 만든다고 했다.
내 부모는 헬리콥터, 나는 캥거루 자녀인 것을 인식하고 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면 지금과 많이 달라지겠지만, 이렇게 되려면 아주 아주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도 했다.
'가족'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하는지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심리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처음부터 내 배경이었던, 그래서 아예 생각자체가 없었던 '가족'에 대해서.
'정상'이라는 말이 누구를 배제하는지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가족 단위의 경쟁이라는 표현을 좀 더 넓게 생각해서 이 단위를 마을로, 국가로, 나아가 세계로 확장하면 그러니까 세계가 한 단위가 되면 이웃의 범위는 넓어지고, 미워하는 사람도 줄어들지 않을까 라고 말했다. 이 학생은 작년 책모임 때도 만났었는데 그때보다 훨씬 부드러운 얼굴을 갖고 있었다.
'알게 되었으므로' '나누고 싶다'가 핵심이었다.
이렇게 풍성한 책모임을 하고 나면 돌아오는 길에 어쩔 줄을 모르겠다.
공연에서 모든 것을 불사른 후 무대에 홀로 남은 가수는 어떤 마음일까 자주 상상하는데 어쩌면 지금 내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같이 무대했던 동료들과 밤새 이야기하며 또 웃고 울고 할까? 그렇다면 책모임 후 벅차오르는 마음을 달래야하는 우리들은 노래를 해야할까. 모임이 끝났는데 교실 떠나기를 머뭇거리던 학생들의 마음도 이랬을까.
어느 외딴섬 로맨틱을
우리 꿈꾸다 떠내려 왔나
때마침 노을빛이 아름답더니
캄캄한 밤이 오더군
이대로 이대로
더 길 잃어도 난 좋아
노를 저으면 그 소릴 난 들을래
쏟아지는 달빛에
오 살결을 그을리고
먼 옛날의 뱃사람을 닮아볼래 그 사랑을
나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지
거긴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그래 넌 두 눈으로 꼭 봐야만 믿잖아
기꺼이 함께 가주지
사랑은 바다 건너 피는 꽃이 아니래
조그만 쪽배에로
파도는 밑줄 긋고
먼 훗날 그 언젠가
돌아가자고 말하면
너는 웃다 고갤 끄덕여줘
참 아름다운 한때야
오 그 노래를 들려주렴
귓가에 피어날 사랑 노래를
완벽히 아름다운 세상이 올까?
그 누가 이웃이 되어도 반갑고 환대하는 세상이
가족에서 자유롭고 타고난 조건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이.
이런 세상이 오지 않는다는 걸. 그러니까 거긴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나는/우리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같이 얘기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같이 노 저어 갈 수 있지.
어느 외딴섬 로맨틱을 꿈꾸어도 되는 이유.
아...마지막에 같이 들을 걸 그랬다.
'사랑은 바다 건너 피는 꽃이 아니라' *빈, *진, *근, *우, *민, *혁, *현의 목소리다.
『이상한 정상가족』에서 인용한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의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가끔 미친 자가 나타나 그 돌을 반대 방향으로 던지기도 하겠죠. 그럼 화가 날 거야. 하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조금만 긴 시간을 가지고 볼 기회가 운 좋게 소 선생에게 주어진다면, 이를테면 40년쯤 후에 내 나이가 되어 돌아본다면 돌은 멀리 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 돌이 떨어진 풀숲을 다음 사람이 뒤져 다시 던질 겁니다. 소 선생이 던질 수 없던 거리까지....중략....어차피 우리는 다 징검다리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하는 데까지만 하면 돼요. 후회 없이."
같이 이어던지기했던 일곱 명의 목소리 오래오래 기억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