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관련 프로그램이긴 한데 독서 토론은 아니었으면좋겠다는 남자 고등학교 선생님의 의뢰를 받았다. 하겠다고 답은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책 읽으라는 압박과 끝없이 쌓인 책 목록 앞에서, 정작 책과는 거리가 먼 학생들을 붙잡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래 고민했다.
프로그램 제목부터 정해야 했다.
제목 정하기가 어려울 때 가장 먼저 하는 건 우리집 책장 훑어보기.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저자의 책부터 자유론이나 레미제라블 같은 고전이 먼저 눈에 띈다. 이러면 안 된다. 다시! 책장만 노려보고 있던 나를 따라 우리집 내 짝도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맞춘다.
“'차라리' 어때?”
『차라리 *** *** **』란 제목의 책을 보고 짝이 건넨 귀한 부사!
차라리: 어떤 상태나 동작의 선택에서 어떤 것보다는 다른 것이 더 나음을 강조하여 이르는 말.
주로 실생활에서는 이도 저도 안 될 때, 선택지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를 특정해야만 할 때 어쩔 수 없이 고를 수밖에 없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책 앞에서 작아지는 학생들 입장에서 ‘딱’이다.
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학생들 입장에선 뭐가 있을까?
학생들의 시간이나 에너지, 돈을 놓고 책과 싸울 수 있는 것들을 떠올리긴 어렵지 않았다. 공부, 연애, 축구, 게임? 우리집에 남자 고등학생이 없어서 더 구체적으로 열거하기는 어려웠지만 대략 이랬다. 그렇다면 책과 대응되는 이 선택지들에서 조금 벗어나보자는 말을 덧붙여야겠다. 부제로 쓸만한 문구가 필요했다.
게임은 많이 했잖아? 축구도 많이 봤잖아? 공부는 힘들잖아? 연애는 어렵고! 우리 차라리 책 읽을래?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못하는 학생도, 안 하는 학생도, 모두에게 공부는 힘들다. 연애가 쉬운 학생들도 간혹 있겠지만 상대의 마음을 얻는 일이 쉬울 리가 없다. 게임은 많이 안 했고 축구는 거의 안 본 학생들에게도 거부감 없이 다가갈 멘트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책이, 차라리 책이 쉽게 다가갈 수도 있고, 생각보다 나와 가까이 있으며 그렇게 어렵지 않게 차근차근 시작할 수도 있다는 게 프로그램의 취지였다. 프로그램의 목표는 멀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책이 재미있을 수도, 심심한 어느 날 게임이나 TV처럼 책을 읽을 수도 있다는 메시지 전달이었다.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한 첫 번째 스텝은 당연 옆 사람이다. 내 옆 친구가 재미있게 읽었다면 나도 그럴 가능성이 조금은 높아진다. 수능 성적표가 발표된 후, 마이크를 쥐고 공부법을 전해주는 전국 1등에게 듣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내가 소개하고 싶은 책 한 권이 다른 친구들에겐 어떻게 다가가는지, 모임 때 소개받게 된, 새로 알게 된 책 중에서 관심 가는 책 한 권만 얻어 가도 성공이다. 거창할 필요도 없고, 교훈이 있을 필요도 없었다. 무겁지 않게 시작할 수 있는 책 생활! 모임 몇 주 전부터 학생들이 소개하고 싶은 책 한 권씩을 구글폼으로 받았고, 비밀 유지를 부탁했었다. 책 제목 게임하려고. 힌트 세 개를 차례대로 준 후 제목을 맞추는 형식이다. 첫 힌트와 글자수가 나오는 순간, ‘내 책’ 임을 알아보는 학생은 씩 웃고 있다.
"아...... 달.... 달 뭐더라.. 달라이트 꿈 백화점? 아~~~"
답답해하며 웃는다.
마지막엔 이 책을 소개하고 싶었던 주인공이 나와 책이 내게 줬던 것, 소개하고 싶은 이유, 진행자인 내가 묻고 싶었던 것에 답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발표하는 시간은 떨리지만 뿌듯하다. 쑥스러워도, 목소리가 좀 작아도 내 선택 소개하는 것만으로 씩씩하다.
김동식 작가의 책이 두 권이나 있었다. 초단편이어서 읽기 가볍고, 책에 관심이 하나도 없던 '내'가 너무 재밌게 읽은 책이라는 소개가 비슷하게 이어졌다. 김동식 작가를 몰랐던 학생이라면, 책에 딱히 흥미가 없는 학생이라면 이런 소개를 받고 시작할 수도 있겠다(이 이야기를 개인 블로그에 올렸는데 김동식 작가가 손수 찾아와 공감 버튼을 눌러줬다. 이런 세심함을 학생들도 그의 책에서 읽어냈던 거겠지).
OOO 세 글자 제목이 3권이었다. 빈칸 세 개를 볼 때마다 '신세계'를 외치는 학생이 있어서 계속 웃었다. 『멋진 신세계』에서 나온 말인지, 첫 번째 문제 힌트였던 '백화점'에서 나온 말인지는 모르겠다. 『총, 균, 쇠』도 대표적인 오답! 콤마, 가 없어도 세 글자 책은 무조건 『총, 균, 쇠』! 안 읽어도 제목은 아는 책을 이럴 때 써먹는다. 오고 가는 오답 속에 싹트는 책 제목들.
두 번째 시간엔 진행자인 내가 소개하고 싶은, 그날 선물로 줄 책들의 일부를 발췌, 낭독하며 시작했다. 팀을 나눴고, 8권의 책과 본문 내용을 연결한 다음, 팀별로 의논해서 공격권과 방어권을 갖는 게임이다. 잠시지만 발췌 부분을 꼼꼼히 읽어야 하고, 상대팀이 질문할 때 그 책을 쓴 저자가 되어 성의 있게 답변/설명해야 하는 방식이다.
팀 별로 질문을 만들었고, 자신의 책에 질문이 들어오면 적극적으로 답을 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저자가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글을 썼는지, 읽을 때는 어떤 자세로 읽으면 좋을지 생각할 수 있었던 시간. BEST 질문 팀과 BEST 답변 팀도 뽑고, 선물도 뽑고! - 소설이 인기가 많았다. 고른 책이 겹쳤을 때 양보하려던 학생들이 '소설' 앞에서 흠. 멈칫! 역시 이야기는 힘이 세다.
마지막 차례는 학생들의 책 잇기.
오늘 소개되었던 다양한 책 중에서 내게 온 책(읽고 싶거나 관심 가는 책)을 한 권 이상 이어보며 발표하는 시간이다. 내가 소개한 책도 선택되긴 했지만, 친구들이 소개해 준 책이 역시 인기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오직 독서뿐』 같이 실질적인 방법이나 지식을 알려주는 책들에 관심을 갖기도 했고, 두 번이나 거론된 김동식 작가 책을 고르는 학생들도 있었다.
청소년에게 '요리법이나 팬티 개는 법같이 생활의 필수를, 자립의 시작을 알려주는 책도, 십 대를 겨냥한 책도, 어느 분야의 덕후가 자기 분야를 캐주얼하게 알려주는 다양한 책도 있다'는 책세상을 소개하는 것으로 내 역할은 끝. 책이 재미있을 수도 있고, 책으로 놀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고, 독서토론도 재밌었지만 팀별로 직접 공격하고 답하는 형식이 새롭게 재밌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담당 선생님께서 들뜬 목소리로 전해주신 후기도 감사하게 잘 받았다.
역시, 학생들이 채우는 시간이 제일 재밌다. 나는 잘 거들 수 있도록, 잘 듣고 잘 만들어야지.
한 번씩 학교에서 남학생들 만나 현장실습하는 내 짝의 도움이 컸다. 오프닝 음악부터 특강 제목까지. 강의료 반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