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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모임에 오는 아이

-얼굴 빨개지는 아이

by 조달리


6개월 동안 이어질 청소년 책모임이 시작되는 날.


첫 책은 "얼굴 빨개지는 아이"였다.


마르슬랭은 이유 없이 얼굴이 빨개진다. 정작 빨개져야 할 상황에선 빨개지지 않는다. 친구들과 좀 다른 마르슬랭은 점점 외톨이가 되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이유 없이 재채기를 하는 르네를 만나 무척 친하게 지낸다. 그들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고 자신이 잘하는 것을 서로에게 아낌없이 가르쳐 주며 늘 붙어 다녔다.


하지만 마르슬랭이 할아버지 집에서 며칠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 르네가 이사를 가버렸다. 르네는 연락처를 남겼는데 바쁜 마르슬랭의 부모는 그 쪽지를 잃어버렸고,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마르슬랭은 다른 친구도 사귀면서 점점 어른이 되었지만 한 번도 르네를 잊은 적은 없다.


어느 날, 버스를 기다리던 마르슬랭은 어떤 사람이 자꾸 재채기하는 소리를 듣는다.

르네다!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세월을 넘어 다시 또 꼭 붙어 다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무심히 슥슥 그려놓은 듯한 장 자끄 상뻬 특유의 데생 스케치가 책 분위기를 한껏 더 살린다.

'나'를 '마르슬랭'이나 '르네'에 빗대 소개할 수 있으면서, 이야기도 부담스럽지 않아 첫 시간에 맞춤하겠다 싶어 고른 책이었다.


"이상했어요. 얼굴 빨개지는 병에 걸렸다고 작가가 말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왜 이게 병이에요?"


책의 첫머리부터 이상했다는 K.


"정면 공포증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찾아봤어요. 병 아닌가요? 나중에 자기 아들도 얼굴 빨갛다고 하잖아요. 유전병 같아요."

"병은 바이러스나 세균이 침투해서 생기는 거 아니에요? 그냥 얼굴 빨개지는 건 마르슬랭의 특징이고요."

"병을 꼭 바이러스나 세균만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병은 시간이 지나면 치유가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치유가 안 되는 거면 장애 아닌가요?"

"그럼 얼굴 빨개지는 게 장애라는 거예요?"

"마르슬랭은 어린이잖아요. 체질도 바뀔지도 모르고요. 이걸 병으로 보는 건 편견 같아요."


책모임 할 때마다 논제를 준비해 가지만, 학생들이 가져오는 혹은 즉석에서 제기하는 질문이 있다면 그게 우선이다. 파닥거리는 생생한 물음표!


이어지는 대화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었던 건 각자에게 모두 다르게 해석되는 '병'의 의미 그리고 '병'과 '특징'을 딱 잘라 다른 카테고리에 넣기는 어렵다는 점이었다.


작가는 마르슬랭이 '병'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는 사실도 다시 확인했다.


작가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학생. 그러니까 작가가 반드시 특정한 교훈을 심어 놓았을 거라 생각하고 그 정답을 맞히고 싶은 한 학생은 '병'이라 확신했고, '어린이'는 자라는 존재이므로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징일 뿐인데 이걸 병으로 보는 건 우리들의 시선이라 말했던 학생들의 대화 릴레이. 내겐 그 어떤 무대보다 더 짜릿하다. 크~


얼굴이 빨개지는 순간을 말해보는 것도 재밌었다.


무엇인가에 집중할 때, 열심히 할 때 얼굴은 빨개진다. 부끄러울 때도 빨개지고, 모두가 나를 바라볼 때도 그럴 수 있다. 내 마음이 어디론가 맹렬히 다가갈 때, 혹은 상대가 내게 뜨거운 시선을 보낼 때 우리는 빨개지는데, "어... 더울 때도 빨개지죠."라는 학생의 말에 '환경'도 중요한 요소라는 걸 다시 인식한다. 나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구나. 어쩌면 마르슬랭에게 그 나라의 온도는 그냥 좀 높았던 건지도. 이런 생각 뻗기가 혼자서 가능할까. 책모임 중독자는 이런 한 마디에도 설레서 어쩔 줄 모른다.


친구가 되어 가는 과정도 재밌다.

나와 비슷해서, 나와 달라서, 관심사가 같아서, 말이 잘 통해서, 장난이 재밌어서 친구가 되고

그래서 좋은 친구는 결국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는 사이

친한 걸 표현하는 사이, 친한 걸 마구 표현해도 어색하게 안 받아들이는 사이

친한 걸 표현하지 않아도 좋아하는 걸 아는 사이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이

갑자기 아무 말이나 해도 씩 웃을 수 있는 사이

좋은데 이유가 없는 사이

내 편이 되는 사이, 나이는 상관없어, 또래가 아니어도 괜찮아


다르게 말하면 좋은 친구는

담요 - 내 단점도, 추운 내 마음도 덮어주니까

안경 - 친구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면 좀 더 정확할 때가 있으니까

공원에 있는 벤치 - 힘들 때 쉬어갈 수 있으니까

그 친구에게도 내가 담요, 안경, 벤치이기를 바란다고.

그렇게 고백한 학생들이 내 담요, 안경, 벤치인 건 말 못 했는데 알까?



마르슬랭이 이상한 병에 걸렸다고 이야기는 시작되지만,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마르슬랭은 미셸(딸로 추정되는)도 가끔 얼굴이 빨개진다고, 신기하다고만 르네에게 말한다.


작가는, 어쩌면 독자는, 그러니까 세상은 마르슬랭이 '이상한 병'에 걸렸다고 보았다. 이게 시작이다.


하지만 르네와 함께 만들어간 시간 덕분에, 혹은 르네 덕분에 마르슬랭에게 쌓인 어떤 힘 덕분에, 그 무엇 때문에, 어쨌든, 마르슬랭 자신에게 그건 병이 아니었다. 그저 신기한 어떤 것일 뿐.


'병'으로 보는 남들의 시선이 마르슬랭의 특징으로 자리할 수 있기까지 가장 큰 힘을 준 사람은 르네.


나의 '병'을 '특징'으로 만들어주는 '르네'는 누구일까.




아름답고 매끄러운 대화로만 시간을 채운 건 아니다.

우리 반에 있는 장애 친구의 특징을 그 자체로 바라보면서 함께 하기에 힘들다는 현실.

특수학교가 있음에도 통합반이 운영되는 이유로 한참을 나누었다.


"선생님은 이런 학생 만나본 적 있어요?" 이런 경험도 없으면서 무조건 좋은 말만 늘어놓는 건 아니면 좋겠다는 눈빛이 그대로 전달됐다. 장애는 특징일 수 있을까. 같이 읽을 책 목록을 더욱 고민하게 만드는 질문. 귀하다.


내가 만약 ________________ 아이 시리즈를 만든다면?


- 평범한 아이 : 특징이 없는 아이도 있을 수 있으니까. 특이한 주인공만 주인공이 아니어도 되니까

- 재채기하는 아이: 얼굴 빨개지는 아이 번외 편으로 '르네'입장에서 이야기가 나오면 재밌을 테니까

- 무식한 아이: 무식은 죄라고 생각한다. 무식한 아이가 얼마나 나쁜 죄를 저지르는지를 보여주고 싶으니까

- 세상에서 제일 폭력적인 아이: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가 어떤 일을 당하게 되는지, 어떤 나쁜 일을 벌이는지 보여주고 싶으니까



나는.... 나는 책모임에 오는 아이 시리즈를 쓰고 싶다:) 만약에 이 시리즈를 써야 한다면 말이다.

마구마구 추천 도서까지 뽑아오는 아이도 있다고 외치고 싶으니까 말이지.


몇 년째 이어오는 모임인지도 잊을 정도로 오래된 모임이지만, 새 학생들을 맞이할 때마다 떨렸다가, 모임이 끝난 후에 오래 혼자 웃는다. 아니었던 날이 없다. 잘 채워가야지. 잘 이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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