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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헌윤 Aug 07. 2020

태양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구름 넘어 존재하는 나다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생기 잃고 지칠 때마다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글귀가 있다. 그 글을 마음으로 만지며 지낸지도 어언 10년이 흘렀다. 감사와 활기찬 생활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도 잃어갈 때, 그 글은 강력한 만트라로 작용해 생의 궤도를 다시 찾아주곤 했다.  

수천 개의 고통, 고문 속에서도 나는 존재하고 태양을   있어. 설령 그것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태양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이미 삶은 충만한 거야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탐욕스러운 지주 표도르의 장남 미챠와 동생 알로샤 대화 속에 나오는 말이다.

이 소설을 처음 접했던 10여 년 전. 나는 벤처회사에서 밤낮없이 일하며 몸과 마음이 누더기처럼 해지고 있었다. 누적된 스트레스는 대상포진, 불안, 불면 등으로 이어졌고, 건강은 악화 일로로 치달았다. 번-아웃 직전 어느 날 출근길. 나는 회사 방향으로 향했던 핸들을 급선회해 김포공항으로 달렸다. 지금 돌이켜보면 생존과 방어를 위한 원초적 선택이었던 거 같다. 나는 제주도행 비행기에 무작정 몸을 실었다.  

뇌성 번개가 하늘을 찢고 폭우로 한 치 앞도 가늠하기 힘들던 월요일. 비행기는 빗속을 뚫고 활주로를 힘차게 내딛고 굉음과 함께 허공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강제로 닫고 잠시 쉼을 청해 보았지만, 머릿속은 걱정, 염려, 근심의 먹구름이 쉴 새 없이 떠다니며 잠시의 쉼도 허락하지 않았다.

두터운 먹구름을 뚫고 비행 고도까지 다다른 기체는 수평 비행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창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살은 눈꺼풀을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살포시 뜬 눈으로 눈망울의 초점을 서서히 모아가자 선명한 파란빛과 투명한 햇살이 눈부시게 펼쳐졌다. 경이로운 풍경에 마음을 집중하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읽었던 문장이 머리에서 불현듯 튀어나왔다.

“... 태양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이미 삶은 충만한 거야...”

불과 1-2분 전만 해도 먹구름과 낙뢰로 흑암에 지배받던 세상이 아니었던가? 그 구름 너머에는 이렇게 항상 밝게 빛나고 있는 태양이 있었음을 망각하고 살았다는 깊은 각성이 마음에 일었다. 그때의 풍경은 내 존재에 대해 추상적 사고가 아닌 본질을 꿰뚫는 직관적 사실로 ‘나’에 대한 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전율이 등골을 타고 온몸을 휘감아 왔다.

내 안의 부정적 생각, 두려운 감정의 먹구름 너머에는 항상 빛나는 태양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엄연한 사실이었고 강력한 진실의 메시지를 대자연은 말해주고 있었다.
그 날 이후 불안과 낙심의 구름이 내 마음을 어둡게 눌러 올 때, 영원히 빛나는 태양의 존재를 떠올려 봄으로 마음의 평안은 좀 더 수월하게 찾아왔다.

독일의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현대인들의 각종 신경증적 증상을 진정한 자기의 모습에서 벗어나 삶을 진정으로 살아내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심리적 고통은 삶의 참된 의미를 자각하지 못해 생겨난 것이고, 본래의 자기에서 분리되어 자기와의 불일치가 커질 때 심리적 고통은 더 깊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구름 넘어 늘 존재하고 있는 태양 같은 진정한 ‘자기(Self)’를 향해야 ‘나다움’으로의 회복이 시작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파국적인 생각과 불안, 우울 같은 감정들과 느낌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착각에 빠질 때가 많다. 어린 시절부터 외부에서 주입된 부정적 자아상을 자신이라 믿으며 삶의 에너지와 열정을 뺏긴 채 살아간다.

생각과 감정은 변화무쌍하게 흘러가는 구름처럼 다양한 그림들을 시시각각 마음의 스크린에 펼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변하는 것들로서 변하는 것은 진정한 ‘자기’가 될 수 없다. 우리가 겪는 심리적 고통은 이러한 동일시의 착각이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변하는 생각과 감정을 ‘나’와 동일시하는 오류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한다.

칼 융이 주장한 ‘개성화(Individuation)’과정은 한 인간이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고 성숙해가는 과정을 말한다. 이 길을 걷기 위해선 자신이 억압하고 회피하는 고통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수용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밝은 것을 상상한다고 밝아지는 것은 아니다. 어둠을 의식함으로써 밝아지는 것이다”라고 말한 칼 융의 주장대로 우리 안의 어두운 그림자, 구름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때, 우리의 정신적 요소들은 하나의 전체로 균형. 통합되어 완성되어갈 것이다.  

어둠과 빛이 상존하는 인생 여정 가운데, 부정 속에서 긍정을 보고 긍정 속에도 부정이 있음을 볼 수만 있다면 삶은 좀 더 가벼운 소풍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삶의 풍랑은 계속 찾아오겠지만, 재해석된 고통의 의미는 우리에게 유연한 심리적 관점을 제공해 줄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의 먹구름이 밀려와도 자신을 그것과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거짓 메시지에 휩쓸리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자연스럽게 피고 지는 기쁨, 슬픔, 우울 등 다양한 감정들과 생각들을 관찰자적 시각으로 판단 없이 바라보며 수용해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둡고 무거운 날에도, 늘 밝게 빛나고 있는 태양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의 삶은 이미 충만한 것이다.

‘나다움’을 일깨워준 상처의 고통에 대해 나는 오늘도 감사하며 계속 삶을 배워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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