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둥이 상담사 아빠의 심리이야기
“너와 나는 오직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만날 수 있다. 온 존재에로 모아지고 녹아지는 것은 결코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나’는 ‘너’로 인해 ‘나’가 된다. ‘나’가 되면서 나는 ‘너’라고 말한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마르틴 부버 “나와 너” 中
지금 쌍둥이 딸들은 ‘나’와 ‘너’ 자아와 상대의 이미지를 서서히 구별하는 6개월을 향해 무럭무럭 성장 중이다. 자신과 상대에 대한 통합된 정서적 이미지들이 획득되면서 ‘나’와 ‘너’, 자신과 타인의 정서적 차이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능력도 형성되고 있다. 통합된 정서적 이미지들을 획득한 아이는 누군가에게 실망할 수 있지만 여전히 상대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우리 아기들은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거울처럼 비춰주고 웃으며, 옹아리 대화들을 통해 ‘나’와 ‘너’의 관계를 위한 기초를 다지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처럼 인간은 관계의 거울을 통해서만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태초에 관계가 있다’라고 말한 마르틴 부버는 인간 존재의 삶의 의미를 관계 속에서 찾으려고 했다. 스스로 단독자로 존재하는 하나님조차, 어떻게 보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관계 안에서 임하신다.
인간을 창조하신 것도 우리와 인격적 만남을 통해 ‘나’와 ‘너’ 사랑의 관계 안에서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함이 아닐까?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지만, 인간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라, 더불어 있는 자이다.
나와 너의 관계는 ‘거래’의 관계가 아닌, ‘사랑’의 관계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어떤 전제조건이나 이해관계가 개입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자본주의, 물질주의에 익숙해져 있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을 접하지만 물질이나 돈을 다른 가치보다 우선시하며 ‘나’와 ‘너’ 보다는 ‘나’와 ‘그것’의 관계를 맺는다. 상대를 목적이 아닌 유용한 거래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며, 전인적인 소통보다 상대한 대한 정보를 통한 피상적 소통에 익숙해져있다.
우리 시대는 단절과 분열, 고립 등으로 소외와 외로움의 고통에 처한 이웃들이 많다. 코로나 위기로 물리적 만남 자체가 더욱 위축된 지금. 소외된 이웃들의 고통은 가중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은, 세상에 처음 태어나 간직했던 순수한 영혼의 만남이 아닐까?
화석처럼 딱딱해지고 굳어진 마음이지만, 우리 인간 안에 태초부터 새겨져 있던 ‘나’와 ‘너’ 관계 DNA를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연대를 통한 시대의 아픔도 회복, 치유되지 않을까?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며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하고 깨끗한 영으로 살고 싶은 소망이 생긴다. 지금 다시 그때의 순수를 회복하고 싶다.
나는 오늘도 아이들을 통해 배우며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