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가 되어 부르는 노래
학창시절 남자들의 주요 놀이 코스는 고깃집, PC방, 노래방이었다. 물론 고깃집은 얇은 냉동 삼겹살집부터 무한리필 고기뷔페까지 변화무쌍했고, PC방을 주름잡던 주옥같은 게임들도 다양했다. 하지만 노래방은 시대를 걸쳐 변함없는 필수 코스였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하던 노래방은 이런 곳이었다. 지하여도 괜찮다. 가격이 저렴하면 족하다. 한 시간 돈을 내면 서비스 시간을 한 시간은 더 주는 곳. 사람이 많아 서비스를 못 받으면 과자 한 대접이라도 더 주는 곳. 이런 조건을 충족하는 곳을 찾아 가면 순서를 번갈아 가며 예약을 한다. 그런데 가끔, 예약을 뭘 할지 몰라 답답할 때가 있다. 노래방을 처음 같이 온 친구가 있다면 선곡을 망설이게 된다. 조금이라도 더 잘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이 작은 가슴은, 노래 부를 차례가 되면 꽤나 두근거린다.
그리고 1분이 남았을 때, 재빠르게 취소하고 마지막 곡을 불러야 했다. 마지막 곡으로는 안재욱의 친구, 크라잉넛의 말달리자, 싸이 챔피언, 여자 친구들이 많으면 체리필터 낭만고양이, 소찬휘의 Tears 같은 노래들이 단골이었다. 그런데 그 수많은 마지막 곡 사이에 새로운 노래가 하나 등장했다.
영석이는 마지막 곡으로 봄여름가을겨울의 Bravo, My Life를 부르자고 했다. 영석이는 안 그래도 노안인 분위기라 친구들이 놀려댔는데, 오늘은 아저씨 같은 선곡에 부르는 자태까지 딱 아저씨다. 게다가 보너스 시간도 없어 과자를 퍼주었는데 새콤달콤한 무지갯빛 과자도 아니다. 김 과자다.
서툴게 살아왔던 후회로 가득한 지난 날
그리 좋진 않지만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었어
달고 짜다. 과자와 김이 어울릴 것 같지 않았는데 다들 군소리 없이 맛나게 집어 먹는다. 얼마 살아보지도 않은 인생, 단만 짠맛 알지도 못하지만, 우리는 Bravo, My Life에서 말하는 생의 힘듦과 의지를 목 놓아 불렀다. 그래봐야 독서실로 돌아갈 뿐인데, 미생의 이성민 부장님 느낌으로 교복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마이크 하나에 얼굴을 맞대고, 손뼉을 쳤다.
Bravo, Bravo My Life 나의 인생아.
이제는 김과자의 달고 짠 조합이 어색하다는 생각조차 못 하는 아저씨가 된 걸까. 친구가 아닌 진짜 아저씨, 진짜 부장님이 부르는 노래를 들었을 때 김과자의 맛이, 아저씨 노래들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프랭크 시나트라 마이웨이,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 임재범 비상, 이용 잊혀진 계절 등.
예전에 이런 부장님 노래를 들으면 한참 비웃었다.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심취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비웃을 수가 없다. 한잔 털어버리고, 어깨동무하고, 엄지를 치켜올리며, 박수를 치며, 별거 아닌 구질한 약속들을 한다. 헌데 왜 그리운 걸까. 그 얕은 정, 존중 마저 없어진 퍽퍽한 사회생활이다.
세월이 담긴 마이웨이,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가창력이 모자르고, 음정이 좀 흔들려도 충분히 아름답다. 예나 지금이나 요즘 애들은 버릇없다. 우리 아버지도 어렸을 때는 버릇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I did it my way
그들은 제 멋대로, 마이웨이를 지켜나가며 열심히 살아왔다. 그에 비해 요즘 부장님들은 조금 쓸쓸해 보인다. 좋은 것 안 좋은 것 회고하며 두 주먹 불끈 쥐겠다는데. 엄지 좀 치켜주면 어떤가, 그 개똥철학 좀 들어주면 어떤가. 별로라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나름 곱씹어보면 꽤 맛이 괜찮은 김 과자다. 그 축 처진 아저씨들은 모두 마이웨이 노래 가사처럼
당당히 받아들이고, 모두 버텨낸 위대한 아버지다.
나는 내 삶 하나도 무겁다. 한데 우리 아버지들은 부모님은 모셔야 했고, 자식한테는 기댈 수 없고, 잔소리 조금 하면 꼰대가 되어버린다. 먼저 큰 강을 건넌 아저씨가 물을 먹었던, 허우적댔던, 무슨 상관인가. 난 그 강 앞에 서있고, 발이 안 닿을까 무섭다. 내 어떻게든 이 검은 물결을 넘어 저기 양지바른 둑에 걸터앉으면,
그땐 이것도 윤슬로 보이겠지.
나는 그들이 마음을 다지며 부르는 ‘아저씨 노래’를 비웃을 수 없다.
강을 건너는 마음을 담은, 음이 좀 틀려도 아름다운, 김 과자 같은 노래를 이제 내가 불러보련다.
지금껏 달려온 너의 용기를 위해,
그리고 찬란한 우리의 미래를 위해
브라보!
해 저문 어느 오후 집으로 향한 걸음 뒤엔
서툴게 살아왔던 후회로 가득한 지난 날
그리 좋지는 않지만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었어
석양도 없는 저녁 내일 하루도 흐리겠지
힘든 일도 있지 드넓은 세상 살다보면
하지만 앞으로 나가 내가 가는 곳이 길이다
Bravo Bravo my life 나의 인생아
지금껏 달려온 너의 용기를 위해
Bravo Bravo my life 나의 인생아
찬란한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한국 대중음악역사의 큰 부분을 차지 하고 있는 봄여름가을겨울이다.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서 출발해, 김현식, 유재하, 빛과 소금(장기호, 박성식)을 떠나보냈다.
사람들의 걱정과 다르게 김종진, 전태관 2인조 밴드는 새로운 역사를 쓴다.
100대 명반에 35위로 1집, 86위로 2집이 올라가있다.
개인적으로는 2집의 <봄여름가을겨울>과, <어떤이의 꿈>을 좋아한다. 아무래도 베이시스트 송홍섭님의 참여가 사운드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걸출한 히트곡들도 있었지만 이내 침체기가 찾아왔다.
그리고 샤워를 하다 문득 가사와 음까지 단번에 떠올라서 만들었다는 곡이 <Bravo, My Life!>
이 곡이 다시 이 밴드를 살린다.
최근 싱어게인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후배가수들을 위한 따뜻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어 그런지 이 가을에 1집의 <사람들이 모두 변하나봐>가 다르게 들린다. 전주에 인색한 요즘, 긴 전주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곡들이 많아 귀가 즐겁다.
https://music.bugs.co.kr/track/3246704
https://music.bugs.co.kr/track/47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