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고 말해줘>속 모은에 대하여
소리는 파동이다. 입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그것은 입자들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며 짧은 진동을 만들다가 곧 사라져버린다. 그렇다면, 사람이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입으로 내는 소리인 ‘말’은 얼마나 많은 마음을 담을 수 있을까. 나는 때로는 말 보다는 침묵이나 글, 어떤 은유가 더 많은 것들을 전달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심한 경우 말이 갖고 있는 파동의 특성때문에 말이란 것이 그 자체로 이상기류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그것은 순항중인 비행기를 흔들어놓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히 사라진다. 때때로 말은 작은 흔들림만을 남겨놓기도 하지만, 때로는 거대한 폭풍이 되어 비행기를 추락시키기까지 한다. 그래서인지 말이라는 것이 내겐 하나의 거대한 기류처럼 느껴진다. 기류를 잘 탄다면 순항을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종종 이상기류로 나타나 사람을 흔들어놓고, 때로는 폭풍이 되어 사람을 추락시키기도 하니까 말이다.
고요 속의 ‘은유’로 가득한 세계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를 보며 서로 다른 세계, 다른 말을 하는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과정을 보며 그 세계에 흠뻑 빠져들어 드라마를 보고 있다. 특히 모은에게 많은 이입을 했다. 모은은 8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승무원으로 일했고, 서른이 넘은 나이에 승무원을 그만 두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나선 인물이다. 나 역시 모은과 비슷한 사람이기에, 그녀의 서른을 숨죽여지켜봤다. 정확하게는 서른 셋이겠지만, 편의상 서른 정도로 말하기로 하자. 모은은 배우라는 열정에 빠져 승무원을 그만둔 후 단역도 마다하지 않고 배우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녀가 좋아하는 건 음악을 듣는 일인데, 정말 뜬금없게도 그녀는 청각장애인인 진우와의 첫만남에서 강한 끌림을 느낀다.
온갖 소리로 분주한 세계. 말로 가득 찬 세계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는 어느 순간 서울의 소란스러움을 느끼게 되고, 그 시점에 다시 진우의 세계를 그리워 하게 되었을 것이다. 진우의 세계는 말이 없는 고요한 세계다. 이 이상기류가 없는 고요한 세계는 모은의 말을 그저 받아주는 세계이며, 모은을 거칠게 흔들지 않는. 고요한 구름위의 대기권과 같은 세계로 기능한다. 지상의 소란스러운 말과 빛들은 닿지 못하고. 진우의 세계는 그저 고요하게 흘러간다. 온갖 소음들은 차단되고, 그곳에서 모은은 진우를 그저 조용히 마주할 뿐이다. 한발짝 서로 떨어져서, 손으로 나누는 대화. 물리적으로 무언가가 가 닿지 못하지만, 닿지 못하기에 그들이 나누는 말에는 더한 신비와 진심이 숨겨져 있다. 침묵은 일종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은 어떤 식으로든 정확하게 표현될 수 없고, 정확하다는 오만은 종종 폭력으로 이어진다. 오로지, 고요 속에서 넘실대는 신비를 가득 품은 은유만이 형체없는 진심을 담아낼 수 있다.
이상기류가 없는 고요한 곳에 가닿고자 하는 마음에 대해서
말에는 인간의 오만이 담겨져 있다. 무언가를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오만. 그리고 그 오만은 내가 그것을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다는 의미를 전제로 한다. 말이 많은 사람들이 언제나 실수하는 것은 그 오만에 잡아먹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 역시도 너무도 쉽게 오만에 잠식되는 말이다. 섣부르게 말하는 사랑은, 대체로 오만이고 오판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런 말들을 제외하더라도, 많은 말은 필연적으로 그저 소음이 될 뿐이다. 그런 소음들은 이상기류만을 일으키며 관계를 흔들어놓고 상처입힐 뿐이다. 요즘, 말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의 많은 말들은 대체로 얼마나 주의력이 부족한 결과로 나온 것인가. 그것은 얼마나 오만스러운 말들이었는가라는 생각들을 하며. 말들로 가득한 세계에서, 그저 고요한 곳에 가닿고자 하는 모은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그리고, 모은의 경우에는 그 고요한 세계에 진우가 있었고 말이다.
소음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고요한 곳에 닿고자 하는 마음을 생각해본다. 어떤 식으로 나는 그 세계에 닿을 수 있는가. 그건 아마도 은유가 있는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상대방을 바라보고,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것. 소음이 아닌 진정한 의미로 서로의 은유를 해석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 수화는 그런 의미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유의 언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소음으로만 가득한 우리의 세계에도 수화와 같이 아름다운 언어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로의 마음을 경청하는 언어. 상대방의 언어를 끝까지 듣기 위해 상대방을 마주하는 언어. 모든 것을 안다는 식의 성급한 말, 상대방에게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는 고성의 말이 아닌, 나의 마음을 그저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그저 침묵속의 언어들. 지나치게 소란스럽기만 할 뿐인 세계에서, 그런 고요하면서도 은유적인 언어들이 적어도 지금의 내게는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언어들이 가능할 때에만,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말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덧붙여본다.
- <사랑한다고 말해줘>, 2023, E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