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나!> 그리고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은 자신의 저작 <사랑의 기술 : Loving of Art>을 통해서 사랑은 어린아이의 사랑과 성숙한 사랑으로 구분할 수 있고, 오로지 성숙한 사랑만이 사람을 성장시킨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성숙한 사랑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에리히 프롬의 견해를 빌리자면, 사랑을 추구하면서 그저 받기만을 원하는 것이 성숙하지 못한 사랑이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유아기 아이들이 부모에게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다. 이 시기의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받기만 하기에, 굉장히 달콤하다. 하지만, 친족이 아닌 타인들과의 사랑, 조금 더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유전자의 모체인 부모가 아닌, 경쟁적이고 대립적인 생존 경쟁 상태에 있는 타인들에게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사랑이 없다면 유전자 복제를 할 수가 없으니, 타인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인간은 살 수가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이렇다. 인간은 유아적 사랑인 받는 사랑을 넘어서 언젠가 성숙한 사랑을 체득하고, 성숙한 사랑을 하기 위해 더 공부해야 한다. 에리히 프롬의 표현대로라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갈고 닦아, 사랑의 명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사람은 더욱 성숙해질 수 있는 것이다.
성숙한 사랑이 성숙한 사람을 만든다, 넷플릭스 시리즈 <이두나!>의 경우
넷플릭스 시리즈 <이두나!>를 보며,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의 서사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이두나!>속 이두나(수지 배우)는 유명 아이돌 그룹의 핵심 멤버로, 무수히 많은 사랑을 받아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사랑을 필요로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두나는 결핍된 사랑을 타인에게서 찾고자 했다. 물론, 그건 두나가 가수라는 꿈을 품은 것과는 상관이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상관이 없어보이지도 않는다. 어쨌든, 어린 시절 결핍된 사랑과 관심을 타인에게 채우려고 했던 두나는 큰 방송에서 방송사고를 내고야 만다. 그녀는 소속사에 그저 "노래가 나오지 않았다"고 말할 뿐이다. 사랑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것은 더이상 사랑을 할 수 없음, 그것을 말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 두나는 잠적해서 한 기숙사에 머물게 되고, 기숙사에서 우연히 오로지 자신의 문제와 자신의 세계에만 몰입하고 있는, 세상사 별 관심없는 올곧은 대학생 원준을 만나게 된다.
원준은 두나를 알지 못한다. 정확하게는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가느라 아예 자신의 삶 바깥에서 펼쳐지는 일들에 관심을 갖지 못한다. 그런 원준이 신기한 두나는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원준에게 접근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쪽에서 밀고, 한쪽에서 당기고. 이런 관계의 장력 위에서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를 향해 각별한 마음을 품게 된다. 두나의 사랑은 이제 받기만 하는 쪽에서, 주는 쪽으로. 그리고 두나는 무조건적인 사랑만을 받아오다가 때때로 돌아서기도, 자신에게 맞서기도 하는 사랑을 받아들이며, 유아적 단계의 사랑만 할 수 있던 단계에서 보다 성숙한 단계의 사랑을 할 수 있는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과잉 긍정으로 그저 좋아요만을 받아오던 사랑에서, 실체와 부딪히며 엇나가다가 다시 교차되기도 하는, 실체적인 부정과 긍정의 혼합물인 타인과의 진정한 사랑을 겪으며 두나의 내면은 단단해지고, 훗날 두나는 자신의 꿈을 찾아 다시 무대위에 설 수 있게 된다. 에리히 프롬이 말한 것처럼, 사랑을 받아오기만 하던 사람이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자 사랑은 이전보다 성숙해지고, 사람 역시 성숙해지게 된 것이다.
무대 뒤에 숨어 있기보다는 다시 조명 위로 나와서
아이돌을 향한 팬들의 사랑은 부모가 아이를 향해 보내는 사랑처럼 일방향이고 무조건적이다. 한편, 아이돌을 향한 안티팬들의 혐오 역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이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무조건적인 혐오라는 두 감정의 극도의 과잉상태에서 두나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두나 본인은 그저 사랑을 바랐을 뿐인데, 아이돌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함께 항상 무조건적인 혐오가 따라왔다. 두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에 대한 확신도 없어졌을 것이고, 그저 사랑도 혐오도 없는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당연히, 더 이상 사랑 노래를 부를, 사랑을 말할 여유도 없었으리라.
서로 다른 유전자로 움직이는 타인이 엉켜있는 세계는 근본적으로 부정성의 세계다. 반면, 가정이라는 세계는 긍정성의 세계다. 부모라는 유전적 모체와 자식이라는 유전자의 복제물은 서로 같은(긍정) 존재로 인식된다. 그렇기에 부모 자식 사이, 특히 모체가 복제품을 향해 품는 사랑의 마음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이런 무조건적인 긍정성의 사랑은 오로지 가정에서만 가능하다. 가정을 나오면, 세계는 부정성으로 들끓고, 인간의 가장 숭고한 감정인 사랑마저도 부정성의 충돌로만 가능한 것으로 인식된다. 가정이라는 작은 긍정성의 세계에서 막 탈출한 두나는 타인과 실체적인 사랑의 감정을 나눠보지 못했기에 막대하게 쏟아지는 들끓는 부정성의 양에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부정성이 뒤엉키며 새로운 어떤 궤적을 그려나갈 때. 삶은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마치, 그녀가 이전과는 다르게 당당하게 목소리를 다시금 낼 수 있었던 것처럼. 사랑, 그리고 타인의 부정성은 나를 흔들어 놓고,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상처가 아물고 난 이후에 우리는 보다 성숙하고, 보다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 앞에 다시 설 수 있을 것이다.
- <이두나!>, 2023,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