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마을 차차차>속 혜진에 대하여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 이정하 시인의 <낮은 곳으로> 중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속 ‘윤혜진’은 현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적인 개인주의자이다. 지적인 개인주의자는 한국 현대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 군상으로, 이들은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우선시 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지만, 이들이 이기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특히 우리사회의 개인주의자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그저 홀로 외롭게 싸워가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마치, 혜진이 원장의 부당한 과잉진료에 홀로 맞서 먼 타지로 떠나온 것처럼 말이다. 한편, 혜진이 훌쩍 떠나온 바다가 보이는 시골 마을 공진의 사람들은 끈끈한 공동체주의로 엮여 있다. 이들에게는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가치가 우선되고, 이곳 시골 마을 공진을 대표하는 사람은 바로 ‘홍반장’이다. 홍반장은 젊지만 개인주의보다는 공동체의 가치에 주목했고, 그 가치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로 홍반장은 공동체 중심의 가치가 우선되는 시골 동네 공진에 잘 적응해서 살아가고 있고,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는 이런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현대인을 대표하는 지적인 개인주의자 혜진과 과거세대를 대표하는 정많고 유연한 공동체주의자 홍반장(물론 홍반장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인물로 완벽한 공동체주의자라고 말하기엔 어려울 수 있겠지만, 일단은 그렇게 부르려고 한다). 두 사람은 어찌보면 양 극단에 서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공동체주의자는 공동체 바깥을 겉돌고 있는 개인을 끝없이 공동체 안으로 포섭하려 들고, 개인주의자는 끝없이 공동체의 바깥으로 탈출하기 위한 시도를 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양극단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갯마을 차차차>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길까.
수없이 끌어당기고, 밀어내고.
합리적인 개인주의자 혜진과 따뜻한 공동체주의자 홍반장의 로맨스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말하자면, 자연스레 두 사람의 사랑은 어떤 것인지를 말해봐야 하고, 사랑에 대해서 말해봐야 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짧은 나의 식견으로 보기에, 사랑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고 지속될 수 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대체로 사랑이란 만날 일이 없던 두 사람의 삶의 궤적線이 우연히 한번 겹쳐지는 사건을 계기로, 수많은 교점(사건)을 만들어가는 일인 것 같다. 두 사람이 살아오며 그려온 삶의 궤적이 결코 완벽하게 일치될 수는 없을 것이기에, 두 선線이 결코 완벽하게 겹쳐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서로의 궤적을 일치시키기 위해 수없이 서로에게 가 닿기 위해 노력하는 일, 수없이 많은 두 선의 교점을 만들어가는 일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내게 사랑이란, 멀리 떨어져있는 누군가에게 가닿기 위한 노력이고, 그 노력의 결실로 한번 시작된 사랑은 대책없이 서로를 끝없이 밀어내고 끌어당기면서 수많은 교점들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어코 나의 선線을 넘어오는 마음
사랑과 선線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드라마가 자신만의 경계안에서 머무르고 있는 인물인 "혜진"의 선을 파괴하고 들어오는 인물들 사이의 역학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혜진은 현대적인 개인주의자로, 선을 긋는 인물이다. 선을 긋는 인물인 혜진은 자연스레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는 이들과 대척점에 놓이고,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에선 개인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혜진과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는 공진 마을 사람들의 충돌이 끊이지 않게 된다. <갯마을 차차차>에선 이런 계속되는 충돌의 결과 끝에 결국 혜진의 견고한 선은 희미해져버린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혜진에게 재앙과 같은 일이 될까?
그렇지 않다. 혜진은 선이 없는 공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오히려 자기 고립으로부터 벗어난다. 자신만의 선은 모두에게 중요하지만, 그 선이 때때로 자기 자신을 고립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고독은 사람을 치유시키지만, 고립은 사람을 고통속에 방치시켜, 서서히 죽어가게 만든다. 우리 사회의 개인주의는 조금 비틀어져 있어서, 그것은 대체로 사람들을 고독이 아닌 고립 속에 몰아 넣는다. 혜진 역시 고립 속에 머물지만, 홍반장을 비롯한 공진 마을의 사람들은 혜진의 선을 기꺼이 넘어온다. 자신만의 선을 침범당한 혜진은 마구잡이로 선을 넘어오는 공진 마을의 사람들에게 지치기도 하고 화도 나지만, 그들이 선을 넘어서 전해주는 마음의 온기로 어느순간 자기 자신이 치유되고 있음을 느낀다. 혜진의 선을 넘어오는 인물로는 홍반장이 대표적일 것이다. 홍반장은 혜진의 선을 기꺼이 넘는다.
밀려오는 파도처럼, 어떤 선도 막을 수 없는 마음이 있다.
선을 넘어오는 홍반장과 사랑에 빠지게 된 혜진은, 선을 지키고 있을 때 얻을 수 있었던 ‘지적이고 당당한 엘리트의 격’을 잃게 되지만, 고립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그녀는 자신만의 선안에서 벗어나자, 비로소 맑고 천진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한편, 홍반장 역시 과거사에 대한 비밀이라는 선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 선은 너무도 공고해서 침투력이 높은 공진 마을의 사람들마저도 침범하지 못했다. 죄책감으로 가득한 과거사가 바로 그의 비밀이고, 그가 타인의 침범을 불허하는 개인적인 ‘선線’이다. 홍반장 역시 그 선 안에서 고립되어 천천히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홍반장의 공고한 선線을 침투하는 것, 아니 파도가 끝없이 밀려오듯이 거의 불가항력적으로 홍반장의 선을 밀고 들어오는 것은 바로 혜진이다. 앞서 자신만의 선에 갇혀 고립된 혜진을 구해낸 것이 홍반장이었듯이, 이번엔 혜진이 자신만의 선에 갇힌 홍반장을 구해내며, 드라마는 언뜻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비춰보인다. 톨스토이의 그 책의 질문에 답하자면,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 고립 속에서 고요하고 천천하게 죽어가는 두 사람을 구한 것은 결국 기꺼이 선을 넘는, 막을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었다.
이제 드라마에서 눈을 떼고, 현실을 둘러 본다.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차별이라는 이름의 ‘선線’들을 본다. 학벌, 지역, 성별, 나이, 직업, 취미. 그 모든 차이가 공고한 선으로 자리하고 있다. 사랑이 시들어가고 그 가치가 무색해진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동일자의 지옥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완벽한 동일자란 없기에 우린 모두 저마다의 지옥에 갇혀 고립되어 있는 것만 같다. 사랑은 포개었을 때 데칼코마니가 되는 것이 아닌, 완벽히 다른 두 궤적이 서로가 다름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합쳐지기 위해 끝없이 충돌하며 교점(나는 이 하나 하나의 교점을 모두 사건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그것은, 자기자신을 벗어나는 사건, Ent-Eignis이다)을 만들어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각자만의 궤적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선과 다름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점을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때, 비로소 사랑이 완성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톨스토이의 말처럼 그 사랑으로 우리의 삶이 조금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 <갯마을 차차차>, 2021, TV 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