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지만,>속 나비에 대하여
생각 이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나를 알지 못하는 데에서 삶의 모든 번뇌가 시작된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나의 현존은 언제나 공허하다.
무지는 번뇌의 근원
드라마 <알고 있지만,>의 나비와 재언이 바로 그런 착각속에서 헤매는 인물들이다. 조소학과 학생인 나비는 아직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단계에 있다. 나비는 자신을 알아가는 첫 걸음으로 자기 스스로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남자와 교제하게 된다. 하지만, 얕은 앎을 갖고 있던 남자와의 관계는 나비의 삶에 어떤 방향도 제시하지 못한 채로 끝나버렸다. 그렇게 허탈하게 끝나버린 연애 후에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남자가 바로 박재언이다. 나비는 재언과의 첫 만남에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낀다. 어쩌면, 생전 처음 느꼈을 법한 감정. 그리고 나비는 그 감정을 해석하지 못한다. 재언과의 관계는 점점 깊어지고, 나비는 점점 혼란에 빠진다. 유나비라는 1인칭 화자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 드라마를 보면, 나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건 재언의 애매모호한 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나비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나비 자신이다.
사랑은 관계의 정의가 아니다.
아무리 우리가 망망대해에 내던져져 있다고 해도, 이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지시해주는 어떤 이정표가 있다면 혼란스러울 일은 없다. 마치 그 옛날 뱃사람들이 밤 하늘의 북두칠성을 보고 막막한 수평선을 향해 항해를 했듯이 말이다. 자기 스스로 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면, 눈앞에 펼쳐진 망망대해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길로 인식될 뿐이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차이가 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물론, 내가 해야만 하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정확히 안다고 해도, 둘의 괴리로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들은 언젠가 자신만의 길을 찾아 자신만의 궤도로 다시 돌아오고야 만다.
다시, 드라마 <알고 있지만,>으로 돌아와서 나비의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자. 나비는 재언의 애매모호한 태도에 혼란스럽다. 우선 나비의 혼란은 둘의 정의하기 어려운 애매한 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비의 상식에서, 그리고 일반 상식에서 사랑하는 두 사람은 연인 사이로 발전되어야 한다. 하지만 재언의 불확실한 태도는 나비를 연인이 아닌 곁에 두고 싶은 친구 정도로 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비는 일상 곳곳에서 재언의 목소리를 듣고, 재언의 모습을 볼 정도로 재언을 사랑하지만, 그 관계가 양방향이 아니기에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나비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자신의 감정이 아닌 관계를 통해서 정의하려고 하고, 나비의 정의는 곧 자신과 재언의 관계에 대한 정의로 이어진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는 걸.”
이때 나비가 말하는 사랑은 감정으로서 사랑이 아닌, 관계를 말한다. 서로 주고받는 감정이 아닌 일방향으로 느껴지는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좋은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관계라면, 그 관계는 무조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생겨날 때, 나비를 오래전부터 짝사랑해온 양도혁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재언과 다르게 나비를 향해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자신의 마음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도혁은 재언과는 다르게 자신의 감정 앞에서, 관계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이런 도혁을 만난 나비는 도혁과의 만남 속에서 안정감과 함께 좋은 감정들을 나누지만, 사랑은 그것 만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나비는 여전히 일상 곳곳에서 재언의 모습을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와 함께 한 기억들을 만난다.
깊은 곳에 숨어있던 자신의 마음을 직시하기
그렇게 시간이 지나, 나비가 재언에게 다신 나타나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이후에도, 나비가 어려움에 처하자 나비를 돕기위해 다시 나비를 찾아온 재언. 이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된 재언은 나비에게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고백한다. 재언은 나비에게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허황된 사랑한다는 고백의 말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말한다. 재언이 자신의 마음을 비로소 알게 되고, 그 마음을 나비에게 처음으로 고백하는 시점이다. 그리고, 나비는 재언의 고백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본다. 나비 역시 비로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편리하지 않고, 언제든 깨질 수 있지만 그런 위태로움 속에 더 아름다운 조소 작업, 마냥 아름답지도, 마냥 편하기만 한 것도 아니지만 계속 생각하게 되는 사람인 재언. 재언의 고백을 받고 난 이후에, 나비 역시 재언을 향해 솔직한 마음을 고백한다.
네가 싫을 때도 많지만, 그래도 좋을 때가 더 많다고. 애매한 관계가 힘든 것도 맞지만, 이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고 말이다. 아마 재언이 나비의 고백을 외면했다 하더라도, 나비는 자신이 재언을 향해 품고 있는 감정이 사랑이 맞았다고 말했을 것이다. 사랑은 관계가 아닌 자신의 감정으로 정의되는 것이니 말이다. 나비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무슨 마음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된 나비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된 것이다. 나비는 비로소 허물을 벗었고, 날개를 펼쳐 더 큰 세계로 날아갈 준비가 된 것이다. 꽉 닫힌 해피엔딩으로 끝난 드라마 <알고 있지만,>이지만, 만약 극 중 나비와 재언의 관계가 실패했다 해도 나비의 삶은 재언을 알기 이전보다 더 아름다워 질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사랑의 힘이기도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게 된 내적 성장의 힘에도 있을 것이다.
- <알고있지만>, 2021, JT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