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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Oct 23. 2021

치열한 백수

민경의 글




ⓒ Brett Jordan on Unsplash


어딜 가나 "어떤 일 하세요?"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취미로 배우기 시작한 피아노 학원에서도, 자주 가는 과일가게와 카페에서도. 예의상 하는 인사치레일 수도 있고 자주 만나니까 진짜로 궁금해서일 수도 있다. 처음엔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서 답하기가 부담스러웠다. 대충 얼버무리며 "아, 지금은 회사 그만두고 쉬고 있어요."라고 답했다. 그러면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 같이 겸연쩍은 미소와 함께 무언의 응원을 보내준다. 휴, 다행이다. 오늘도 잘 넘겼다. 왜 근데 내 얼굴은 빨개져 있는 걸까.



'회사 그만두고 쉬고 있는 상태'란 언젠가는 다시 회사로 돌아갈 예정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런데 사실 난 회사로 돌아갈 마음이 거의 없다. 회사 다닐 때 모아둔 돈이 바닥나고,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 정도가 되면 마지못해 돈을 벌러 나가야겠지만 그때에도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기보다는 아르바이트를 먼저 구해볼 예정이다. 회사는 최후의 보루다.



종종 남에게 나를 백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문득 백수라는 단어의 뜻이 궁금해져서 검색해보니 '돈 한 푼 없이 빈둥거리며 놀고먹는 건달'이라고 나온다. 아니 사전 양반, 백수가 돈 한 푼 없이 빈둥거리고 놀고먹는 거 까지는 그렇다 쳐도 건달이라니. 너무 한 거 아닌가? 어쩐지 백수라는 말을 쓸 때마다 어감이 썩 좋지 않더라니. 세상의 백수들이여, 우리 함께 들고일어나야 한다.



지금 나는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삶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고 행동에 옮기고 있다. 단순히 돈만으로 내 인생의 성패를 논하고 싶진 않다. 이 고민의 결과들이 지금 당장 수입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삶의 자양분이 되어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빈둥거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걸 해볼까? 저걸 해볼까? 내 머릿속은 늘 바쁘다. 그렇기에 앞으로는 의식적으로라도 백수라는 단어를 지양해야겠다. 직업이 없다고 해서 속 편히 아무것도 안 하면서 뒹굴거리는 건달은 아니니까.



남들에게 나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아직도 미지수다. 한 줄로 말하자면 ‘회사 밖으로 나온 탈출자이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고 싶은 자립형 인간’이다. 퇴사 초반에는 탈출을 자축하며 놀고먹느라 바빴지만 이제는 새롭게 다가올 나의 미래를 위해 여러 가지를 도모하고 있다. 이렇다 할 성과가 없어서 실패 기록만 늘어가고 있는 게 함정이지만. 



그래도 29년간 살아오면서 오롯이 내 의지로 무언가에 이렇게나 많이 도전해본 적은 처음이다. 이렇게 책을 쓰는 것도 그중 하나다. 회사 밖에는 내가 모르는 다양한 세상이 있었고 나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뗐을 뿐이다. 나의 걸음마는 비틀비틀 누가 봐도 위태롭지만 이런 시간들이 없다면 결코 두 발로 걷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힘들더라도 이를 악물고 또 한 발을 내딛는다.



효율적인 측면으로 보면 누군가에게 나를 한 단어의 직업으로 멋지게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이 참 아쉽다. 저에게 2박 3일을 주신다면 제가 지금까지 뭘 해왔고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해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만. 혹시 듣고 싶은 분.. 아 안 계시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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