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곁들인 활에 붙은 오명을 씻을 단초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경위 중 하나로 '예절'을 대하는 태도가 있었다. 옳음을 지향하는 바른 마음가짐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타인을 찍어 누르려는 왜곡된 마음을 경계하고자 함이다. 비단 활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자기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만 곡해하는 아전인수我田引水가 문제다.
활과 술이 딱 그 꼴이다. 사실 과거에 활과 술은 서로 잘 어울리는 한쌍의 부부와도 같았다. 논어에도 활을 쏘며 술을 마신다는 기록이 나오니 그 역사가 얼마나 유구한가.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궁사들에게 술은 활 쏘면서는 엄격히 금지해야 할 '악惡'으로 취급된다. 한 때의 짝은 이제 강제 분리 되어 견우와 직녀마냥 떨어져서 서로를 그리워만 하고 있는 처지에 놓여버렸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경쟁하지 않나니 꼭 해야 한다면 활쏘기를 할 뿐이다. 손을 모아 서로 절하고 당에 올라가 (활을 쏘고) 내려와 진 사람이 술을 마시는데 그 경쟁도 군자답게 이루어진다.
<논어> '팔일' 편 중
그 원인은 전적으로 제 좋을 대로만 해석하는 무뢰배들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술은 알코올이며, 그것이 일정량 이상 인체에 들어왔을 때 일어나는 작용은 선조들이나 그 후손들이나 매한가지일 테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술에게는 죄가 없는 것 역시 매한가지다. 그 사람의 본래 모습이 술을 통해 드러났을 뿐이다. 돈이랑 비슷하다. 돈 그 자체에 선악은 없다. 선한 자에게 들어가면 선하게 쓰이고, 악한 자에게 들어가면 악하게 쓰인다. 돈은 그저 인간이 두른 가식의 장막을 거두고 숨은 본성을 들춰낼 뿐이다.
오해되거나 오용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다이너마이트 역시 도구에 불과하며,
거기에 선악의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다.
-노벨
전국에는 400여 개의 활터가 있다. 깨끗한 시설에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활터도 있지만, 지방 시골에 위치하여 50~60대가 막내 노릇을 하는 활터도 있다. 그런 곳에는 '취중습사醉中習射'가 지금도 암암리에 이뤄진다. 술을 진탕 마셔 과녁도 제대로 겨냥하지 못할 정도가 되기도 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본인의 화살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잃어버리는 것은 둘째 치고, 그것이 민가에 끔찍한 피해를 끼칠 수 있다는 점은 그들은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사람들이 선비정신을 계승코자 하는 진정한 '한량(활량)'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무뢰배라 일컫는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활 쏘는 사람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사람들이다. 음주 운전자에게 강력 처벌과 함께 면허를 압수하듯, 이런 자들에게서는 강력한 처벌과 함께 궁시弓矢를 압수해야 마땅하다.
아쉬운 건 '불량 활꾼'만이 아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 전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증세를 제거하는 것은 현대사회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다. 감기가 걸려서 병원을 찾으면 감기가 걸린 근본 원인을 진단하지 않고 증상을 멎게 하는 약만 덜렁 내어줄 뿐인 것이 그 전형적인 경우다. 술로 인해 발생한 활터의 문제에 대해 현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조치가 내려졌을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술을 금지시키고 해당 활터 문을 닫게 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문제는 사람인데 술을, 더 멀리는 활터를 없애잔다. 그런 논리면 술을 나라에서 안 파는 것이 근본적 해결일 텐데 말이다.
술과 활의 위험성을 이미 오래전에 인지한 덕분에(?) 국궁은 이미 전국체전이나 전국대회가 있는 국내 스포츠종목 중에 유일하게 '음주단속'을 하는 종목이 되는 불명예를 겪게 됐다. 2002년부터 시작된 이 같은 단속을 통해 혈중 알콩 농도가 일정 수치 이상으로 적발될 경우 대회에서 바로 탈락된다. 우리 선조들은 활을 쏘며 술을 마셨으니 이렇게 하는 것이 전통을 지키는 길이라는 식의 제멋대로 해석이 자아낸 멋진 작품이 아닐 수 없다. 혹자의 말을 빌리자면 음주문화로 인한 폐해가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다. 정작 전통 운운하며 술을 마시는 사람은 하나같이 옛 선조들은 어떻게 활쏘기를 했는지와 같은 활쏘기의 전통에 대해선 관심이 전혀 없다. 그들에게 전통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술을 마시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본디 술과 활은 예법이 중요한 의식에서부터 서민들의 놀이에까지 다양하게 곁들여진 약방의 감초 같은 존재였다.
가장 먼저 대사례大射禮를 꼽을 수 있다. 대사례란 국가에 행사가 있을 때 임금과 신하가 한자리에 모여서 활을 쏘며 그 예의 도수禮數를 살피는 의례로, 1477년(성종 8년)에 처음 시행됐다. 임금이 아니라 지방관리가 주관할 땐 향사례鄕射禮라고 했다. 조선시대에 활쏘기는 예禮와 악樂을 연마하는 수단이자 정신 수양 도구로 중요하게 여겼다. 사례는 유교적인 윤리를 보급하고 군신 간, 그리고 사대부 간의 친목 도모를 위한 행사였다고 할 수 있다.
사례에는 술과 음악이 등장한다. 우선 임금과 신하가 성균관에서 석전제를 올린 후, 활터에 나아가 술을 마시고 두 명씩 짝을 지어 각자 네 발의 화살을 쏘았다. 활을 쏠 때는 대사악장大射樂章 이라는 음악에 맞춰서 화살을 쏘았다. 과녁을 맞힌 자와 그러지 못한 자를 나누어 맞힌 자에게는 상품을 하사하고, 못 맞힌 자에게는 벌주를 주어서 후일을 경계하게 했다. 왜냐하면 활쏘기는 심신 수양의 수단만이 아니라 외세의 침략과도 같은 비상시를 대비하는 훈련으로서의 기능도 했기 때문이다.
중앙에 사례射禮가 있었다면, 민간에는 편사編射와 활 백일장이 있었다. 편사가 무사나 한량(무과준비생)들의 양반 주도의 활쏘기였다면,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활 백일장이 있었다. 전자는 친목도모와 모의훈련이라는 목적으로 시행된 것이고 후자는 윷놀이, 씨름과 같이 행해지던 민속놀이와 같은 성격이 강했지만 성행한 시기가 왜란을 겪은 이후라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근본적인 목적은 비슷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반대로 편사 역시 조금 더 고상함과 법식, 절차가 복잡했을 뿐 크게 보면 놀이의 성격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경외(京外(서울지방))의 무사들과 동리사람들이 모여 과녁을 겨룬다.
그런 후에 음주로써 즐긴다. 다음철에도 또한 그러했다.
『동국세시기』중
아쉽게도 고증자료가 부족하여 활 백일장은 그 형태가 고스란히 후대에 전해지고 있지는 않다. 그래도 편사는 그에 비해 보존이 비교적 잘 되어 온 편이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모의 전쟁이나 예법 완성의 수단보다는 놀이의 성격으로 변모했다. 인천지역의 편사는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형태를 유지해오고 있다는 자부심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놀이 성격이 강한 활쏘기가 일어나는 잔치마당에 술과 음식이 빠졌을 리 만무하다. 이렇듯 활과 술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한쌍이었음이 분명하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잘 보존해오고 있다고 평가받는 인천 지역의 전통 편사에서도 술과 음식이 있다. 서울 지역의 편사를 보존하려고 하는 서울 장안편사 놀이에도 마찬가지이며, 전통활쏘기의 뿌리를 찾아가는 사단법인 온깍지협회에서 주관하는 한량놀음 활쏘기 한마당에도 술과 음식이 제공된다. 전부 필자가 경험했거나 가까운 분을 통해 들어본 곳들이다. 그런 행사에서 음주로 인한 사건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마냥 활터에서 술을 마실 수 있어야 한다는 단순한 주장을 펼치려는 게 아니다. 무작정 활터에서 술로 인한 문제가 생겼다고 다짜고짜 술을 금지하는 행정적 처리는 활에 대한, 그리고 활과 술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전무한 폭력적인 처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아무 비판 의식도 없이 동의하고 마는 현대 활꾼들에 대한 아쉬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술은 그 어떤 칼보다도 예리한 날을 가진 양날의 검이다. 그렇기에 다루는 데 있어서 상당한 주의와 철저한 원칙이 필요한 것이 맞다. 활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평소에는 술을 마기지 않았다. 병사들에게도 전투나 훈련 중 음주를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군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포상이나 단체 회식 등의 자리에서는 술을 허용했으며, 충무공 자신도 상관이나 명나라 장수를 대접할 때는 술을 마셨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임금 중에서도 술을 즐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영조는 애주가였는데 83세까지 장수도 했다. 태종, 세조, 정조 역시 술을 사랑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힘들게 왕위에 올랐고 정통성 문제로 시달렸다는 것이다. 신하들과의 관계를 잘 풀어나가기 위해서 술을 즐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 비교적 순탄한 재위 기간을 보낸 세종, 성종 등은 술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주량도 약했다고 전해진다. 세종은 술에 취해 횡포를 부리는 양반들이 많아지자 이에 대해 훈계하는 교서를 전국의 관청에 걸어두게 하기도 했다. 애주가 영조는 아이러니하게도 10년이나 금주령을 내리며 조선 역사상 가장 긴 기록을 남긴 바 있다.
금주령이 내려져도 국가 제사와 임금이 베푸는 연회, 사신 접대 그리고 과거 합격자의 축하연, 제사나 환갑, 혼인 등의 행사에는 예외적으로 허용됐다. 흥미로운 점은 활쏘기 장소에서 활을 쏘는 사람들에게도 술이 허락됐다는 점이다. 당대 활이 가진 위상과 활과 술이 가진 불가분의 관계를 모두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현대에 술과 활의 합방을 불허하는 큰 이유는 현대의 술은, 주로 유흥과 쾌락의 도구로만 비치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술은 '먹는' 음식이지 '마시는' 음료가 아니었다. 땅에서 난 귀한 정기를 가득 받은 오곡五穀을 담근 술은 (적당히 마실 때만) 보약이나 다름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문종이 승하한 후 상주였던 단종이 허약해지자 신하들이 약으로 술을 권했을 정도라고 하니 술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지금으로 치면 보약이라 할 수 있는 술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술이 아니라 장인이 손수 빚어 담근 전통주를 일컫는 것이리. 활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록색 소주나 아스파탐 팍팍 들어간 막걸리는 활꾼들이 마셔야 할 술로 부적합하다는 게 필자의 소견이다. 전통적으로 활과 술이 끈끈한 관계였으니 전통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활을 쏘며 술을 마시겠다고 할 것이라면 제대로 갖출 생각부터 해야 한다. 술 마실 자격을 갖추라 이거다.
술과 활이라는 겉모습만 따를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신을 읽어내도록 해야 한다. 최소한 선조들은 어떻게 활을 쐈을까 왜 쐈을까 관심을 가지고 배우려고 해야 할 것이며, 술 역시도 공장판 술이 아니라 전통의 명맥을 잇는 술을 곁들여야 하지 않을까? 물론 과음이 아닌 '선비스러운' 방식으로.
조선시대 선비들은 다양한 재료와 다양한 방법으로 빚은 술을 마셨다. 그때그때 절기에 맞는 방식과 재료들로 만든 술을 즐기는 것이니 '절기주'인 셈이다. 설날 아침에 온 가족이 모여 마시는 도소주, 대보름의 귀밝이술 등이 대표적인 절기주다.
절기주와 함께 등장하는 것이 선비들의 풍류다. 술자리에서 시를 한 수 지어 낭송하기도 했으며, 더위를 피해 연꽃을 바라보며 고두밥과 누룩을 섞고 연잎으로 감싸 발효시켜 만든 벽통배碧筩杯를 마시기도 하는 등 낭만을 즐길 줄 알았다. 그들이 마시는 술은 속된 말로 '부어라 마셔라' 먹는 술이 아니었다. 그들은 술이 약 중에서 최고의 약이며, 독 중에서도 최고의 독임(백약지장 백독지장 百藥之長 百毒之長)을 알았기 때문이다.
술과 풍류를 논하면 기생집에서 작당모의를 하던 장면을 떠올리기 쉽다. 졸부, 장사꾼, 부패한 관리, 친일파 등이 일삼던 향락이 풍류로 와전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선비들이 누리던 풍류는 오늘날 말하는 사치와 향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보다는 스스로를 갈고닦으며 양심을 지킨 것에 대한 소박한 보상에 가까웠다. 지조와 절개에 대한 보상 말이다.
조선시대 선비는 학문에 정진하는 학자이자, 수행을 하는 철학자였다. 선비의 가장 큰 덕목은 스스로를 수양하는 것과 인의예지신이라는 오상의 덕목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런 보상은 선비의 사후에 치하되어 남은 가족들이나 후손들이 덕을 입을 뿐 당사자의 몫은 아니었다. 살아생전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그게 바로 풍류다.
그림 속 장면처럼 꽃이 만연한 봄날 자연을 벗 삼아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기울이는 술 한잔의 망중한忙中閑은 현대판 유흥과 쾌락이 주는 것에 비하면 소박하지만 그들에겐 달콤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선비도 인간이다. 정신의 끈을 팽팽히 하다가도 때론 느슨하게 풀어줄 필요가 있는 법. 그것을 명분 삼아 쾌락을 좇는 자들은 소인배이자 무뢰배였을 테다. 선비들은 그저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강물 위에 시 한 수를 지어 띄워 보내며, 음악 속에서 술 한 잔을 기울이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시 낮잠을 자면 그만일 따름이다.
그들이 그들 자신을, 그들의 동료를 위로하며 서로의 길을 포기하지 말자며 격려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풍류였다. 거기에서 선비들의 기개인 사기士氣가 꺾이지 않고 유지가 됐다. 풍류는 선비들의 사기*를 높이는 조촐하지만 낭만 가득한 수단이었다.
*사기를 진작하다 할 때 그 '사기'다.
이상의 논의에서 다뤘듯 활과 술은 역사적으로도 관계가 매우 두텁다. 하지만 우리가 지니고 있는 역사적 무지에 대한 벽 역시도 두터운 것이 현실이다. 활과 술이 만나면 위험해지는 것이 아니라 풍류가 완성된다. 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다루려 하지 않는 각 개인의 주도酒道의 부재가 문제다.
논어에는 활쏘기에서 졌을 때 마시는 벌주를 마시는 예법에서부터 그 벌주가 갖는 깊은 의미까지도 서술하고 있다. 이런 세세한 영역에까지 제대로 된 이해를 하고 있는 국궁인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필자 역시 그런 무지의 대열에서 논외는 아니다. 그러니 국궁인들이여, 음주 습사는 금지시키는 것을 일단은 '잠정적 결론'으로 남겨두자. 아직 술과 활이라는 견우직녀의 상봉을 논하기는 시기상조다.
그러나 술과 활의 어울림에 서려있는 선비의 기상만큼은 잊지 않고 가슴에 늘 품고 간직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진정한 의미의 싹수있는 활꾼이 되고자 한다면 말이다.
인간은 가슴에 뜨겁게 품고 있는 그것을 결국에는 닮아가는 법이다. 그것을 깨달은 자가 활을 쏘며 마시는 술은 백번 마셔도 결코 해로움이 없을 테다.
1. 이재진. (2014.10.10). 왕과 함께하는 활쏘기 "대사례(大射禮)".국립민속박물관 블로그. https://blog.naver.com/tnfmk/220146700790
2. 이종승, ""죽는 줄 알았다".. 위험천만 궁도장", MBC, 2022.10.07. https://imnews.imbc.com/replay/2022/nwtoday/article/6414755_35752.html
3. 소마연구소, "전국체전 경기장에서 웬 음주단속", MOOKAS, 2006.10.19. https://mookas.com/news/4434
4. |죠리퐁|, "下而飮(하이음):활터와 술", 弓:활을 배우다 (네이버 블로그), 2024.4.12. https://m.blog.naver.com/btx4267/223413056216
5. 윤채근, "<논어>'팔일(八佾)'편 - 활쏘기, 승패를 초월한 경쟁. 2024.4.20. https://naver.me/5Ht1ewg8
7. 정진명, 『한국의 활쏘기』, 학민사, 2018
8. 정진명, 『활쏘기의 나침반』, 학민사, 2018
9. 최광호, "정선아리랑과 함께하는 전통 활쏘기 한마당", 2014.10.06. https://www.newsway.co.kr/news/view?tp=1&ud=2014100617172569091
10. 전형일, "윤 대통령과 금주령[전형일의 세상만사]", 이코노미스트. 2024.5.4. https://economist.co.kr/article/view/ecn202404290019
11. 최미화, "선비들의 술자리문화, 풍류를 배운다", 대구일보. 2024.7.4. https://www.idaegu.com/news/articleView.html?idxno=603722
12. 심규섭, "풍류(風流)와 사기(士氣)", 통일뉴스. 2020.10.22.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133